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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암

仁山 -세발낙지 2013. 12. 8. 21:20

 

 

설악산 오세암(五歲庵)

 

 오세암

절의 이름을 오세암이라 했는지 궁금하다.

그러나 오세암전설은 초등학교 창작동화로도 실리기도 했구,

영화로도 나오구,

애니메이션,전설의 고향으로도 오세암편이 방영되여 많은 이 들에게 알려져 있지만

왜 오세암인지 아는이는 그리 많지 않으리라..

 

조선시대 설정(雪淨) 스님은 고아가 된 형님의 아들을 이 암자에 데려다 키우고 있었다.

겨울이 막 시작된 10월의 어느 날,

스님의 월동준비 관계로 양양의 물치장터로 떠나게 되었다.

 

이틀 동안 혼자 있을 네 살의 조카를 위하여 며칠 먹을 밥을 지어 놓고 스님은 신신당부하였다.

이 밥을 먹고 저 어머니(법당 안의 관세음보살상)를 향하여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이라고 부르면 잘 보살펴 주실 것이다.”

이 말을 남기고 절을 떠난 스님이 장을 본 뒤 신흥사까지 왔을 때,

밤새 내린 폭설로 길에는 사람의 키보다 더 높은 눈이 쌓여버렸다.

혼자 속을 태울 뿐 어찌할 수 없게 된 스님은 겨울을 지나 눈이 녹은 이듬해에 겨우 돌아 올 수 있었다.

그런데 법당 안에서 목탁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는 것이었다.

 달려가 보니 죽은 줄 알았던 아이가 목탁을 치면서 가늘게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었고,

 방안의 훈훈한 기운과 함께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스님이 아이를 와락 끌어안고 그 까닭을 물었다.

 

저 어머니가 언제나 찾아와서 밥도 주고 재워도 주고 같이 놀아도 주었어요.”

그 때 갑자기 한 젊은 백의여인이 관음봉으로부터 내려와 동자의 머리를 만지면서

성불(成佛)의 기별을 주고는 한 마리 푸른 새로 변하여 날아가 버렸다.

관세음보살의 가피에 감격한 설정 스님은 다섯 살의 동자가 관세음보살을 신력으로 살아난 것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관음암을 중건하고

오세암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섯 살의 어린 김시습(金時習:1435~1493)이 세종 임금과 주고받은 대화를 통하여

오세(五歲)의 별칭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때 세종이 동자의 학문은 흰 학이 푸른 허공 끝에서 춤추는 것 같도다.(童子之學 白鶴舞靑空之末)”라고 하자

김시습은 성군의 덕은 마치 누런 용이 파란 바다 가운데서 뒤집는 듯하옵니다.(聖主之德 黃龍飜碧海之中)”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이후 오세(五歲)는 김시습을 지칭하게 되었다.

 오세암이 김시습과 관련 있다는 설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것은

 이복원(李福源:17191792)1753년에

설악산을

유람하고 지은 설악왕환일기(雪嶽往還日記)이다.

 

 

 

 

 

 

 

세상에 알려진 전설과 큰 차이가 없다.

무진자(無盡子)가 전해오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인지,

 본인이 창작한 것인지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1923년에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면 오세암 전설이 들려주려는 주제는 무엇일까?

 문화원형백과에 오세암 창건설화라고 소개하고 있으니,

오세암이 세워진 까닭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전설에서 관세음보살의 대자대비(大慈大悲)와 부처의 영험성을 읽는 사람도 있다.

 전설은 역사상 사건을 소재로 하고 증거물이 남아 있다고 했는데,

오세암 창건설화는 현재 관음전 옆 마당에서 바라볼 때 뒷산이 관음조암(觀音鳥巖)으로,

 전설에 나오는 관음보살의 응신이고,

반대편 백담사 쪽으로 바라볼 때 있는 바위가

관음보살이 오세 동자를 아들처럼 안고 있는 모습을 한 어머니바위다.”라고 말을 잇는다.

오세암 주변에 있는 바위가 증거가 됨으로써 듣는 사람들은 고개를 끄떡인다.

그런데 오세암을 찾았던 수많은 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오세암이라 불리게 된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았다.

김시습이 이곳에서 거처하였기 때문에 오세암이 되었다고 믿었다.

윤춘년(尹春年:1514~1567)매월당선생전(梅月堂先生傳)에서

김시습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오세암의 역사에서 잠시 살펴봤던 대목이다.

암자의 이름은 오세동자의 뜻에서 취했다고 한다.

[菴名取五歲童子之義云]’는 것은 설정 스님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기록했음을 알려준다.

계속 이어지는 글은 당시에 김시습 초상을 모셨다는 것을 알려준다.

황경원(黃景源:1709~1787)인제현오세선원기(麟蹄縣五歲禪院記)에서

 당시 임금(영조) 25년에 스님 설정(雪淨)이 설악산에 올라 선생의 오세선원(五歲禪院)을 찾으니

 폐허가 된지 100년이 되자,

그 터로 나가 다시 세웠다.

 310개월이 지나 암자가 완성되자 선생의 초상화를 구해 소장하고,

나에게 기록을 청하였다.”라고 적은 것을 위에서 살펴본 바 있다.

설악산을 유람하다가 오세암에 들린 사람들은 한결같이 김시습의 초상화를 언급하였다.

안석경(安錫儆:17181774)1760년에 오세암에 들렸던 일을 雪岳記에 적는다

 

 

 

 

 

 

 

 

다섯 살에 세종께서 승정원에 부르시어

시로 그를 시험한 뒤 크게 칭찬하시고 비단 50필을 내려주시며

 제 스스로 가져가게 하니,

 선생이 각기 그 끝을 연이어 끌고 나감에 사람들은 더욱 기특하게 여겼다.

 길에서 늙은 부인이 두부를 주며 먹도록 하니,

곧 시로 읊었다. (중략) 이에 이름이 온 나라에 진동하여 사람들이 지목하여

 오세(五歲)라 일컬었지,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하였다.

 

 

 

 

 

 

 

 

 

 

 

 

 

 

 

 

 

 

 

 

 

 

 

 

 

 

 

 

 

백담사를 지나 영시암을 넘어 오세암에 이르는 길은

가을이면 사색의 길이다.

같은 생각에 잠긴 연인들이 즐길수 있는 유일한 사색의 길이지 않을까 싶다.

 

 

 

 

 

 

 

 

인산찍고

인산쓰고

 

 

 

오세암으로 가는 사색의 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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