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산(踏山)/仁 山 風 水 踏 山 記

한확선생 묘역

仁山 -세발낙지 2011. 10. 30. 21:52

 

 

1.踏山日時 :2011.10.30.일

 

2.踏山場所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산69-5

 

3.現地日氣 :맑음

 

4.明堂의 特徵  

  1)物形論 :모란반개형,화심혈

  2)明堂內歷(陰,陽宅) : 한확(1403∼1456)은 조선 초기 문신으로 자는 자유(子柔), 호는 간이재(簡易齋),

                시호는 양절(襄節)이다. 고려 시중 강(康)의 후손으로 순창군수 영정의 아들이다.

                누이가 명나라에 뽑혀 들어가서 태종 문황제(文皇帝)의 여비(麗妃)가 되었다.

                그리고 누이동생은 명나라 선종의 후궁이다.

                그 힘으로 세종 2년(1420년)에는 명나라에 가서 금,은의 공물 면제를 허락받고 돌아왔으며,

                세조 2년(1456년)에는 사은사로 중국 연경에 가서 세조의 왕위의 정당성을 명나라에 설득하였고,

                귀국하는 길에 사하포(沙何浦)에서 숨졌다.

                아들은 한치인(韓致仁)·한치의(韓致義)·한치례(韓致禮)이고, 딸은 인수대비(仁粹大妃)이다.

                인수대비의 아버지로 9대성종의 외할아버지가 되며,묘역 1985년 6월 28일 유형문화재 제127호로 지정되었다.

                묘역은 정남향으로 동서 직경 750㎝, 높이 240㎝의 원형봉분은 용미가 없는 대신 활개를 갖추고 있다.

                묘 앞에는 두 개의 묘표가 있는데, 좌측 것은 옛 것으로 글씨가 마모되었으며,

                우측 것은 옛 것을 모방하여 새로 만든 것이다.

               묘표는 장방형 대석(75×29×44)과 비신(66×23×129)과 옥개석(104×60×23)으로 되어 있는데,

               특히 대석의 하단에는 고려양식의 안상문을 장식하였다.

               묘표 앞의 상석과 좌우의 망주석은 새로 만든 것이다. 상석 앞에는 향로석(39×34×45)이 있고,

               중앙에는 장명등(220)이 있는데, 사각 지붕모양으로 웅장한 느낌을 준다.

               좌우의 문인석(201)은 머리부분이 납작하며, 눈을 부리하게 뜨고 있으며 턱수염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놓았다.

               좌측 문인석의 경우는 신체에 비해 홀을 맞잡은 두 손이 왜소하나

               전체적으로 조선 초기 석물에서 보이는 화려하면서도 웅장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것은 묘의 주인이 왕실과 관계된 사람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석물 중의 일부가 도난 당한 흔적이 있고, 석물의 크기에 비하여 묘역이 좁은 듯한 느낌을 준다.

               신도비는 경강 국도변 조안면 능내리의 묘소 입구에 서향하여 정면 3칸,측면 3칸의 비각 내에 보존되어 있다.

               비는 장방형의 대석 위에 대리석으로 된 비신(129×35×255)과 이수(126×104×54)로 되어 있다.

               대석은 지대석(400×365×20) 위에 이중의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올려 놓았는데,

               상부(188×127×70)에는 겹꽃잎의 연화문을 새겼고,하부(283×255×34)는 2층으로 나누어 각각 안상문을 새겼다.

               대리석으로 만든 비신은 마모가 심하여 글씨가 잘 보이지 않으며,쌍룡과 운문을 조각한 이수는그문양이 섬세하다.

               비 상단에 전서로 “襄節韓公神道碑銘”이라 하였으며,

               비제는 “有明朝鮮國輸忠衛社協贊靖難同德佐翼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西原府院君

               贈諡襄節韓公神道碑銘幷序”이다.

               비문 끝에 “弘治八年八月”이라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비는 1495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는 1494년 4월 인수대비가 부친의 묘에 비가 없음을 슬퍼하자 성종이 우참찬 어세겸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고,한확의 셋째 아들 한치례에게 비의 건립을 맡게 하여 이듬해에 세웠다.

               글씨는 성종의 사돈 임사홍이 썼는데 부드러운 송설체이다

  3)入首龍 :癸丑에서 壬子入首

  4)坐   向 :壬坐丙向 

  5)破   口 :丁未破(左旋水)

 

5.踏山後記 :용맥이 크고 후비지며,계축용에서 임자룡으로 꺽이는 부분이 초보자들은 언른 알아보기 힘들다.

               자세하게 관찰을 해야 알아볼 수 있다.그리고 석등이 매우 크며,망주석이 경기이북지방은 가까이 세우면,

               호남지방에서는 멀리 세운다.그리고 망주석에 다람쥐가 내려가는 것은 암컷이고 올라가는 것은 숫컷이다.

              

6.현장사진

 

 

 

신도비각

 

 

 

 

몇백년의 세월동안 묘역을 지키고 있는 향나무 유유한 자태

 

 

 

 

 

 

 

 

 

 

 

 

 

 

묘역에서 본 안산

 

 

 

 

 

 

 

 

입수룡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