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산(踏山)/仁 山 風 水 踏 山 記

정창손 선생묘역

仁山 -세발낙지 2011. 10. 30. 21:50

 

 

1.踏山日時 :2011.10.29.토

 

2.踏山場所 :경기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 산37-1

 

3.現地日氣 :맑음

  

4.明堂의 特徵  

  1)物形論 :음부혈(陰婦穴)부부적임을 명시.

  2)明堂內歷(陰,陽宅) : 조선 전기의 문신인 정창손 선생의 묘역이다.

                정창손(鄭昌孫,1420~1487)은 세종 8년(1426) 문과에 급제하여,

                세조 때부터 성종에 이르는 15년간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좌익공신·익재공신·좌리공신 등 여러 공신에 책봉되었으며, 중종 때에는 청백리에 선정되었었고,
                조선 전기 문신.《고려사》,《세종실록》,《치평요람》편찬에 참여했다.

                익대공신 3등에 책록되고 1469년 원상, 1471년 좌리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며 궤장을 하사받았다.

                본관 동래(東萊). 자 효중(孝中). 시호 충정(忠貞). 1423년(세종 5)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426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고,

                1441년 사섬서령(司贍署令)으로 전임되었다. 1444년 응교(應敎) 때 한글제정을 반대하여 파직,

                투옥 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와 응교에 복직,

                1446년 집의(執義) 때 왕실의 불교숭상을 반대하여 재차 파직되었다.

                다음해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직제학(直提學)이 되고

                1449년 춘추관편수관(編修官) ·수사관(修史官)을 겸직,

               《고려사》 《세종실록》 《치평요람(治平要覽)》 편찬에 참여하였다.

                1451년 (문종 1) 동부승지(同副承旨) ·대제학 ·병조판서 등을 지내고, 1453년(단종 1) 이조판서가 되었다.

                1455년(세조 1) 우찬성(右贊成) 때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책록되고,

                봉원군(蓬原君)에 책봉되었다. 이듬해 단종 복위 음모를 고변한 공으로 부원군에 진봉(進封)되어

                우의정에 오르고 1457년 영의정이 되었다. 1462년 왕위를 세자에게 양위하도록 상소하여 삭직되나,

                용서받고 부원군에 복작(復爵)되었다.

                1468년 예종 즉위) 남이(南怡) ·강순(康純)의 옥사를 처리하여 익대공신 3등에 책록되고

                1469년 원상(院相),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1475년 영의정에 재임된 뒤 1485년 사직하였다.

                1504년 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가, 중종 때 신원(伸寃)되었다.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3)入首龍 :  

  4)坐  向 :  

  5)破  口 :

5.踏山後記 :강남 시계획으로 인해서 1970년도 이 곳으로 이장,용맥의 흐림이 상당히 어지러워 입수룡분간이 어렵다.    

               1453년 이조판서가 되고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이 병권을 장악하자 세조의 신하로 활약하게된다.

               이듬해 사위 김질(金瓆)로 부터 성삼문 등 死六臣이 세조를 죽이고 단종의 복위를 꾀한다는 계획을 듣고,

               이를 한명회를 통하여 世祖에게 고변하여 수충경절좌익공신(輸忠勁節佐翼功臣) 2등으로 부원군에 봉해졌다.

               이 후 좌의정,우의정을 거쳐 1458년 영의정에 오른다.그리고 한글창제에도 반대한다.

6.현장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