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산(踏山)/仁 山 風 水 踏 山 記

다산 정약용선생 묘역과 생가

仁山 -세발낙지 2011. 10. 30. 21:51

 

 

1.踏山日時 :2011.10.30.일

 

2.踏山場所 :경기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 산75-1

 

3.現地日氣 :맑음

  

4.明堂의 特徵  

  1)物形論 :돌혈(突穴)

  2)明堂內歷(陰,陽宅) :정약용(鄭若鏞,1762~1836)이 태어나고 또 세상을 떠났던곳은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현

                마을이다.그는 조선후기의 실학자로 자는 미용,송보,호는 다산,삼미,여유당,후암.본관은 나주로 어려서 주로

                부친으로 부터 경사와 시문을 배웠다,

                1789년(정조 3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검열,지평,수찬을 거쳐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를

                지냈고,이듬해 동부승지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주문모 사건에 연루되어 금전찰방으로 좌천되었다.

                1801년(순조 원년)신유박해에 연류되어 장기로 유배된뒤에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강진으로 이배 되었다.

                   영조 38년, 1762년은 오래된 조선이라는 나라에 한줄기 서광이 비치던 해였다.

                   조선 학자로, 희대의 실학자로, 높은 수준의 개혁가이던 다산 정약용이 태어난 해였다.

                   음력 6월16일 다산은 태어났지만, 그 한 달 전에는 조선 최대의 비극으로 꼽히는 ‘임오(壬午)사건’,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어가야 했던 참극이 일어난 해였음을 알아야 한다.

                역사와 사상에 있어서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민족사관을 가졌던 다산은

                해남윤씨 윤선도의 손자 윤두서의 외손자로서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저술을 할 때

                외가 해남을 오가며 많은 도서들을 참조하기도 했다.

 

  3)入首龍 : 

  4)坐  向 :癸坐丁向  

  5)破  口 :팔당호가 보이면서 山水同去,白虎가 따라가버린다.

 

5.踏山後記 :생가와 묘역을 한꺼번에 답산을 했던 곳이다.살아서도 선조들한테 도움을 받지 못하는데 죽어서 

               무슨 영화를 누리겠는가 그러면서 풍수를 배척한 사람중의 한사람이다.

               길보다 흉이 더 많아 보인다.청룡쪽 능침살,백호쪽 산수동거

               18년 강진 유배시절 목민심서,경세유표등 수백권이 저술되었다.

6.현장사진

 

 

다산 정약용 초상

 

다산 여유당길

 

 

 

 

 

 

 

 

 

 

 

 

 

 

 

 

 

 

 

 

 

 

 

 

 

 

 

 

결인처는 형성되어 있는 것이 확연하게 보이지만,

좌청룡쪽이 능침살이 치고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묘지 둘레 예장

 

 

 

 

좌청룡쪽 민가뒤로 밀고들어오고 있는 능침살

 

 

 

여유당에서 올려다 본 묘역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