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踏山日時 :2011.10.30.일
2.踏山場所 :경기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산5
3.現地日氣 :맑음
4.明堂의 特徵
1)物形論 :玉壺貯水形(옥호저수형),起龍穴같기도 하다.
2)明堂內歷(陰,陽宅) :대명당
성종 10년(1479년)∼중종 39년(1544년).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문서(文瑞).
증조는 김삼근(三近), 조부는 김계권(金係權), 아버지는
연산군 4년(1498년) 진사에 합격하고, 중종 8년(1513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군자감직장을 거쳐 성균관전적·예조좌랑·병조좌랑·경기도사·헌납·이조정랑·병조정랑·예조정랑·제용감첨정·
평양서윤·시강원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전적 때 관북지방에 가뭄과 메뚜기 피해로 기근이 들어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데도 삼남(三南)의 곡식을 조운할 마땅한 사람을 고르지 못할 때 낮은 관직으로 뽑혀
명성과 경륜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평양서윤이었던 1523년 관서지방에 전염병이 만연하자,
둔전책(屯田策)을 건의하고 농업에 힘써 백성들의 먹을거리를 넉넉히 하고
군졸들의 잡다한 세(稅)를 없애주어 백성의 주거를 편안하게 하였다.
그러나 뒤에 요승(妖僧) 학조대사(學祖大師)의 조카라 하여 탄핵을 받았고, 재물에 대한 탐욕이 지나쳐서
당시 사림들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았다.
김번의 묘는 조선 8대 명당자리 중 하나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대명당으로 그 후손들 중에서 왕비 3명,
정승 15명(영의정만 8명), 대제학 6명, 판서 35명, 청백리 청음
기타 문과·무과에 등극한 사람이 무려 300여명이나 되고 그 유명한 안동 김씨 세도가를 이뤘다.
김번의 묘소는 기룡혈(騎龍穴)로 유명하다. 남양 홍씨의 땅이었으나,
김번의 아내가 친정에 부탁하여 자리를 마련한 명당이다.
이후 안동 김씨는 김번의 자손인 김극효의 장자
넷째 아들
김번의 묘소는 약간의 아쉬움이 있지만, 명당으로서 갖추어야 할 것들을 모두 갖추었다.
혈(穴)이 횡룡(橫龍)에 맺히어 뒤에 거북이 머리 모양의 산과 그 뒤에 여러 산이 겹겹이 낙산(樂山) 역할을 하고
있고 다소 낮기는 하지만 귀성(鬼星)도 존재하고 우측에는 부(富)를 상징하는 금성(金星)이 자리하고 있다.
좌청룡, 우백호는 물론이거니와 내당(內堂), 외당(外堂)을 갖추고 있어 명당으로서의
기본적인 구조들을 모두 갖추었다.
사람들을 이 자리를 술병에 물을 가득 담아 놓은 옥호저수형(玉壺貯水形)이라 이름 하였고,
하늘에서 바라보면 혈의 북쪽에 현무(玄武;거북이)가 고개를 내밀어 뒤를 받쳐주는 형국으로
오랜 동안 복(福)을 받을 자리임을 알 수 있다.
3)入首龍 :甲子龍-壬子龍
4)坐 向 :子坐午向(兌向)
5)破 口 :丙午破-當門破
5.踏山後記 :묘지에 막들어서는 순간 약간 평지같지도 하고 한눈에 딱 명당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가 보기에 상당히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이리저리 왔다갔다 둘러보아도 도무지...
연발 하늘에서 헬기를 타야하나...모든것을 다 구경하고 싶은 심정인데...그럴수가 없다.
다시 한번찿고 또 찿아서 입체지도를 살펴보고 다음에 다시 찿으리라...아쉽다...
조선8대명당이라고 했눈데...
화성(火星)인 오방(午方)에 응(應)한 조산(朝山)이 화성의 문필봉(文筆峰)을 이루어 득지(得地)하고
성수오행(星宿五行)상 왕사(旺砂)가 되니 문장(文章)이 끊이지 않겠다.
6.현장사진
도로에서 막 들어서면 한눈에 들어오는 안동김씨번산 비석
마을입구를 지나서 약 5분정도 들어가면 나즈막한 야산에 형성된다.
김번묘역입구 전경
비석이 삿갓모양으로 상당히 특히하다.
조선8대명당 안동김씨 김번묘역이다.
문 인 석
-전하는 이야기-
원래 이 일대의 모든 산은 남양 홍씨의 선산이었다고 하는데 이 곳이 안동김씨의 선산으로 바뀐 전설이다.
남양홍씨 집안에서 안동김씨 집안으로 딸을 시집보내 두 집안은 사돈의 관계의 있었다.
안동 김씨가로 출가한 홍씨부인이 친정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석실마을로 갔다.
당시 홍씨 부인은 남편 김번과 사별을 하고 아들 하나를 두고 혼자 살고 있었는데,
안동 김씨네에에 보낸 지관으로부터 친정아버지가
묻힐 자리가 옥관자,금관자가 3말씩 나오는 옥호저수형 즉 옥병에 물을 담은 형국의 명당이라는
소리를 들은 홍씨 부인은 그 자리가 탐이나 밤새 광중(壙中)에 물을 길어다 부었다.
아침에 하관을 하기 위하여 친정 식구들이 나와 보니 광중에 물이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닌가?
광중에 물이 차있으니 이런 곳에 장사를 치를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에
홍씨 부인의 친정아버지는 다른 곳에 장사지내게 되었다.
3년 후에 홍씨 부인은 이미 죽은 남편 김번을 옥호저수형의 명당에 이장 시켰는데
그 후로 안동 김씨 일가에는 정승 15명, 판서35명,
왕비3명을 위시한 고관대작과 문장, 충신이 수 없이 나왔다고 한다.
묘역 뒤로 꺽여져 올라오는 결인처부분
잡목과 풀섶에 가려진 부분이 묘역이다.
호리병입구에 가면 암석이 하나 돌출되었는데 이것이 호리병 마개라고 한다.
한국정음정양풍수지리학회(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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