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월산(秋月山)
늦가을 추월산
가을 낙엽은 다 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하얀눈을 기다리고 있다.
어제 내린비로 물안개가 피여올라 뿌연이 시야가 별로 조치 안타...
오르면 오를수록 숨은 가파지고 발걸음은 무게감을 더한다.
오랜만에 찿은 산걸음이라 무척이나 힘이 든다.
숨은 턱밑까지 차오르고 땀은 비오듯 쏟아진다.
그래도 오르는 걸음마다 시원한 바람이 간간히 마지하여
깊은 숨을 고르게 해준다.
오늘 추월산 코스는 현위치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보리암을 걸쳐 보리암정상찍고
추월산 정상부근에서 점심을 먹고
월계리 마을로 하산할 계획이다.
소요시간은 약 4시간정도
추월산과 금성산의 고지도
추월산정상까지는 약 3km정도 남았다.
제일 힘든 코스
추월산을 오르다 보면 보리암중간쯤에 나타나는 동굴이다.
임진왜란당시 이 곳은 마을사람들이 피신하여 몸을 숨긴곳이다.
추월산 절벽에 핀 보리암전경
추월산보리암 김덕령장군 부인 흥양이씨 순절처 명문
추월산보리암 입구로 내려가는 계단 오른쪽 암벽에는 임진왜란때 의병장군으로
활약하신 충장공 김덕령장군의 부인 홍양이씨가 왜적에게 쫓기자 몸을 던져 순절한
곳을 알리는 명문이 새겨져있다.
이 명문은 조선현종6년(1840)담양부사 조철영이 새겨놓은 것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충장공덕령부인흥양이씨 만력정유매왜적순절처몰후224년경자
보리암에서 바라본 담양호의 운해
보리암에서 바라본 용마루길과 담양호의 주차장 전경
보리암에서 바라본 담양호
담양호와 운해
담양호상류에 하얗게 보이는 부분이 담양국씨선산이다.
담양호와 아름다운 산세
보리암정상에서 바라본 월계마을
보리암정상에서 바라본 하류쪽 담양호의 모습
순창복흥면에 세워진 대법원연수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 이승만 대통령과 맞장 뜬 가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이승만 대통령은 김병로 선생을 대법원장으로 임명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우선 그가 자신과 정치적 노선이 다른 사람이었고,
너무 청렴하고 대쪽같은 성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할 수 없이 대법원장에 임명했는데,
그 대쪽같은 성품으로 이승만 대통령과 대립하기 시작했습니다.
반민특위 조사부 책임자 회의를 마치고 기념촬영한 모습.
앞줄 왼쪽 열번째가 김병로 대법원장
김병로 대법원장은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관장을 맡아
반민족행위자 처벌이 민족의 과제임을 천명하고,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친일파 처벌에 미온적인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족특별법 개정을 요청하자 이를 거부했습니다.
이승만 대통이 친일파를 옹호하고
반민특위를 해산하자,
이에 대해 정면으로 대통령을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6.6사건은 중부 경찰서의 단독 결정이 아니라
내무부의 명령에 따라 빚어진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경찰의 이 행위는 직무를 초월한 과잉며 불법이 올시다.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이 중대하기 때문에
국회와 정부 당국은 비상시국에 적정한 정치적 조치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따라서 사법기관에서는 추호도 용서없이 법대로 판단할 것입니다.'
1950년 국회 프락치 사건이 발생하자,
법원은 국회의원에게 징역 3-10년의 가벼운 형벌을 내렸습니다.
또한 안호상 전 문교부 장관의 국보법 위반 사건,
윤재구 의원 횡령 사건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또한,이승만 독재를 반대하는
서민호 의원이 자신을 살해하려던
서창선 대위를 사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정당방위로 그를 풀어주자,
이승만은 다시 부산정치 파동
(부산에 공산 게릴라가 침투했다고 조작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이승만의 정치공작)을
구실삼아 서민호 의원을 구속했지만,
법원으로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이 판결에 대해 이승만은 화가 나 김병로
대법원장에게 따졌습니다.
'도대체 그런 재판이 어디있습네까?
현역장교를 권총으로 쏘아 죽였는데
무죄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립네까?'
그러자 김병로 대법원장은
당연하다는 듯 잘라 말했습니다.
'판사가 내린 판결은 대법원장인 나도 이래라 저래라 말할 수 없는 겁니다.
절차를 밟아 상소하면 되지 않습니까?'
“폭군적인 집권자가,
마치 정당한 법에 의거한 행동인 것처럼 형식을 취해
입법기관을 강요하거나
국민의 의사에 따르는 것처럼 조작하는
수법은 민주 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를 억제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법부의 독립뿐이다.”
(부산정치파동 직후 김병로 대법원장이 대법관들에게 강조했던 말)
김병로 대법원장이 독립운동가 변호나 청렴한 생활도
아주 중요한 덕목이지만,
그가 사법부의 독립을 강력하게 외쳤고,
그것을 위해 대통령이 화를 내도 판사들을 막아주며
사법부를 지켰다는 점도 우리 대한민국 사법부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김병로 대법원장을 그를 미워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탄압에도 버티고 버텨
70세의 나이로 정년퇴임을 합니다.
그는 정년 퇴임한 후에도 변호사 개업도 하지 않아
'전관예우'와 같은 일은 하지도 받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퇴임하면서 했던 말은
그가 어떻게 대한민국 대법원을
이끌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동안 가장 가슴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전국 법원직원들에게 지나치게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이다.
인권옹호를 위한 사건처리의 신속을 강조한 것이 그렇고,
살아갈 수 없을 정도의 보수로 살라한 것이 그러했다.
나는 전 사법 종사자에게 굶어 죽는 것을 영광이라고 그랬다."
사법 종사자에게 굶어 죽는 것을 영광이라고 강조했던
대법원장은 마지막 기자회견장에서
또 다시 말을 합니다.
"나는 그래도 관사와 좋은 차와 상당한 보수를 받았으나,
법원서기들 봉급은 쌀1가마니값 정도에,
초임법관들이 2가마 값 정도였고,
10여 년 경력의 중견법간들도 봉급이라야 쌀3가마니 값을 넘기지 못했소.
이런 적은 월급을 받으면서도
법질서 확립과 인권옹호를 위해 밤잠을 자지 않고
일하는 법관들을 볼 때마다 나는 안타까운 심정이었소.
그러나 천하가 일자리는 커녕 먹을것,
입을것이 없고,
발 뻗고 잘 방한 칸 없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에서
얼마나 됐든 국록을 받은 사람은 불평하거나
돈을 탐내서는 안 된다고 말해왔소!"
이승만의 정치 공작에 놀아난
국회와 대한변호사 협회가 그를 공격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당당히 맞섰습니다.
"나는 단언하나니
오늘날까지 재판에 있어서나 사법 운영에 있어서
나의 소신과 양심에 어그러진 판단을
한 일은 한 번도 없었고
장래에도 없을 것을 확언한다.
독립된 사법 운영에 추호도 양심의 가책을 받을 일이 없다."
변명도 아닌 당당한 그의 이 말에
그를 향했던 모든 비난은 잠잠해졌습니다.
이런분이
오늘날 대한민국 헌법을 만드셨고 또 지켜왔습니다...
현재 후배들이 그 높으신뜻을 기려서
대법원연수원을 가인선생님의
고향 순창복흥면에 세웠다.
추월산정상석(731m)
추월산정상석과 인산
인증샷
인산찍고
2016.11.27.추월산의 늦가을....
'^*^----명 산(踏山) > 명산 산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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