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방사(花芳寺)
화방사는 원묘국사 요새 (圓妙國師 了世 1163 - 1245)가 백련사(白蓮寺)를 창건할 당시
암자(庵子)로서 1876년(고종14) 화주 경신(敬信)이 새로이 중창하고
12년 뒤인 1888년 화산인선(華山仁善 ) 스님이 발원하여 중주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탁본으로 한지에 쓰여진 글씨-
강진읍에서 동북쪽으로 7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화방마을에는 마치 연꽃이 피어 있는 모양의 화방산(花芳山, 252.6m)이 있고, 그 중턱에는 화방사(花芳寺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서쪽에 자리한 비파산(琵琶山, 399.5m) 기슭에는 신라시대 때 고운 최치원이 세웠다는 고운사가 있었다고 하나 이 절은 빈대가 극성을 부려 폐찰 된 뒤 지금의 화방사로 이건했고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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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방사는 고려시대 1211년(희종 7년) 원묘국사가 백련사를 중창하면서 보은산 고성암과 함께 지은 화방암이 그 시초이다. 화방암은 뒤에 화방사로 고쳤으며, <강진현지>에 기록된 나한사(羅漢寺)가 곧 지금의 화방사로 나한도량 이었다. 또한 화방암은 1876년(고종 13년) 화주 경신스님이 새로 중창하고 다시 1888년에 화산 스님이 중수했다. 그리고 1912년에는 태흥 스님이 삼존묘상과 16진용을 모셨는데, 당시 절의 모습이 지금과는 달리 자못 화려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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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새로 지은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구조이며, 특기할만한 것으로 1917년에 세워진 천불산 화암사 사적비가 있다. 이비는 대흥사 스님으로 초의선사 제자인 원응 계정(圓應戒定)스님이 지었는데 만덕산 백련사의 연혁과 함께 화방암의 기록이 남아 잇어 강진 불교 역사 연구에 귀중한자료가 되고 있다. 현재 조계종 소속으로 대흥사의 말사인 화방사는 이 지역에서는 잘 알려진 사찰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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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방산 중턱에는 마치 장군이 우뚝 서 있는 듯한 형상의 선바위(立岩)가 있다. 옛날 어느 전쟁 중에 적군이 화방산 일대의 마을을 점령하기 위해 쳐들어 오다가 이 바위를 장군으로 잘못보고 군사들이 매복해 있는 것으로 착각한 나머지 혼비백산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래서 화산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마을의 수호신이나 다름없는 이 바위의 공적을 높이 추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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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화방산 자락에는 형제가 나란히 서 있는 듯한 형제바위와 누가보아도 광대의 얼굴을 닮은 광대바위가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오래 붙잡는다. 옛날 인근 마을에 인색하기 짝이 없는 한 부자가 살았다. 하루는 스님이 찾아와 시주를 부탁하였으나 냉대를 하자, 기분이 상한 스님은 이 부자를 골탕 먹이기 위해 더 부자가 될 수 있는 묘안을 알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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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묘안인 즉 "건너편 산에 있는 형제바위가 서로 많이 차지하려고 싸우고 있는 형상이므로 둘 중 하나를 없애버리라"는 것이었다. 이에 부자는 석공들을 데리고 올라가 형제바위 사이에 구멍을 뚫어 서로를 떼어놓았는데, 이후 그 부자는 곧바로 망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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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의 우애와 협력의 상징을 망쳐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바위의 영향인지 주변 마을에는 쌍둥이 출산이 잦다고 한다. 광대바위는 형제바위 위에 있다. 물론 스님이 그렇게까지 인정없이 한일은 아니라고 알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욕심을 경계하고 있어 듣는 이의들의 잔잔한 미소를 자아낸다. |
화방사에는 급수가 부족한 모양이다
화방사 옆 계곡을 막아 물길을 돌려서 급수 조달을 한 모양이다.
옛날부터 사찰이나 암자는 물이 풍부해야 부자가 된다고 했거늘...
참....
가을 황금들녘의 모습
2011.10.03.강진화방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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