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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의 자랑 옥장인 장주원장인

仁山 -세발낙지 2016. 9. 1. 11:55




 [장인을 찾아서] 중요무형문화재 옥장 장주원씨



용의 입안에 구르는 옥구슬…옥공예 종주국 중국도 인정


장주원 옥장 금음체질







장주원 옥장이 단단한 옥을 섬세하게 가공하기 위해서 갈이틀을 돌리고 있다.

 갈이틀은 두개의 발판을 번갈아 밟아 동력을 전달해 옥을 가는 전통 기계이다.

작품 하나를 만드는 데 최소 6개월이 걸린다.


공예라기보다는 마술이다. 상상하기 어려운 기술이다.

옥으로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을 만들었는데,

용의 입안에 옥구슬이 굴러다닌다. 여의주를 따로 입안에 넣은 것이 아니다.

 옥 하나를 붙임 없이 만들어낸 것이다. ‘환주기법’이다.

쇠사슬 모양의 옥 목걸이 역시 붙임 없이 하나의 옥으로 만들어냈다.


 하나의 원석에서 실을 뽑듯이 둥근 고리를 끊김 없이 연결했다.

옥공예가 오랜 전통인 중국에서는 금으로 고리를 만들어 사슬을 만들지만

그가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고리 연결 기법’을 이용하면 끊김 없이 옥 사슬을 만들 수 있다.


옥을 다루는 마술에 가까운 그의 기술은 ‘회전 관통기법’에서 절정을 이룬다.

물과 술을 담는 주전자를 옥으로 깎아 만드는데,

 좁은 구멍을 뚫어 옥의 내부를 파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옥의 내부 곡면을 따라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마치 내시경 없이 수술하는 형국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몸뚱이로 갈수록 구멍을 넓게 파기도 하고,

주전자 주둥이와 몸체 사이에 차를 거르는 체도 조각했다.

보이지 않는 주전자 속에 촘촘한 망을 만든 것이다.


연마기가 옥을 갈아내는 마찰음을 손으로 느끼며 작업해야 한다.

 온몸의 감각을 총동원해서 해야 하는 초정밀 기술이다.


기술 완성에 무려 30년이 걸렸다.

옥을 깎아내는 기계도 그가 독창적으로 만들었다.

중국의 옥공예사들이 범접 못하는 그만의 기술이다.




 


백옥 봉황 연 향로, 녹옥 봉황 연 향로.





중요무형문화재 100호인 옥장(玉匠) 장주원(77·사진)은

장신구에 그치던 우리의 전통 옥공예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스승도 없었다. 제대로 된 문헌도 없었다.


오랜 시간 노력과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옥공예 종주국인 중국을 능가하는 경지에까지 오른 것이다.


“좋은 옥 원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만사 제치고 달려갑니다.

오감이 요동을 칩니다. 그리고 그 돌을 손에 넣으면 희열이 넘칩니다.”



“좋은 옥 보면 오감 요동 희열 넘쳐”

원석 찾으러 전세계 50개 나라 원정

30년만에 개발한 옥 사슬 기법 ‘마술’

20대 종로 귀금속상가 ‘목포짱’ 명성

깨진 옥향로 수리하다 옥빛에 빠져

중국서 최고명예 ‘1급 대사’ 칭호 초청



그가 지금까지 원석을 구하러 다닌 나라만도 50여개국.

한번은 러시아로 달려가 옥 원석 48톤을 거금을 들여 사왔는데

고작 조그만한 장신구 두 개를 만드는 데 그쳐야 했다.


원석의 속이 부실했던 탓이다.

“대부분 공예는 작가가 작품을 먼저 정하고 재료를 고르지만

 옥은 그 반대입니다.


옥은 자기 운명을 자기가 정해요. 아무리 향로를 만들고 싶어도

 향로감이 될 만한 옥이 없으면 못 만들어요.”


한번은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옥을 만지면서 용의 입안에 여의주를 굴러다니게 깎겠다고

한번이라도 노력한 사람에겐 나의 기술을 전수하겠다.”

수십명이 모였지만 아무도 손을 들지 못했다.



 


오석 해태여의 이중태환식 연결고리, 청옥 원앙 삼사자 향로




그의 아버지(장중현)는 목포에서 금은방을 했다.

어려서부터 금은세공에 눈을 뜬 장주원은 학창 시절 음악과 미술,

공작 등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고, 고교 졸업 뒤 악단에서

 색소폰 연주를 하다가 서울로 올라와 22살 때부터 종로에 있는

금은 세공장에서 본격적으로 공예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숙련된 보석가공사가 하루 두 개를 만들던 복잡한

공정의 값비싼 목걸이 장신구를

그는 하루에 150여개를 만들어내는 ‘신기’를 발휘했다.

그만의 독창적인 기술이 세상을 놀라게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돈도 벌었다. 그는 종로 귀금속 상가에서 ‘목포짱’으로 불렸다.



그러던 어느날 깨진 옥향로를 수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막막했다. 보름간 두문불출하며 방황하다가 인생의 목표점을 찾았다.

 “서양의 보석은 빛을 외부로 발산하며 자태를 뽐내지만,

옥은 빛을 흡수하며 마치 달빛처럼 은은한 미를 내뿜어요.

부서진 보석이나 고쳐주고 살고 싶지 않았어요.

앞으로 20년 안에 세계 최고의 옥공예 기술자가 되기로 맘을 먹었어요.”



 


자스퍼 입식 관통 주전자.



중국과 수교 전이어서 옥공예품을 볼 수 있는 대만의 박물관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아침에 빵과 우유를 사들고 박물관으로 들어가 온종일 중국 전통의 옥공예품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며칠씩 박물관에서 시간을 보내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스케치를 하고 곧바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다.

그러곤 공방에 틀어박혀 혼자 연구하며 옥을 깎아내는 비법을 익혀 나갔다.

 정신 집중을 위해 한겨울에도 난로를 켜지 않고,

하루 한 끼에 2~3시간씩만 자며 노력했다.

“내년 봄에 중국 정부가 옥공예 최고 명예인

 ‘1급 대사’ 칭호를 준다며 초청했어요.

중국 옥 예술을 따라잡은 거죠.”



목포/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브라보 멋진인생47-3] 옥처럼 귀한 인생, 옥장인 장주원

                                                   

* 명로진이 만난 사람 "옥처럼 귀한 인생 - 옥장인 장주원"


 (옥공예 전시관 ☎ 061 277 1594 / 전남 목포시 산정동 74-209번지)


스물다섯에 시작한 옥공예는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까지 이어졌으니

그에게 옥은 삶의 방향이며 이유였다.


중요무형문화재 100호 옥장인 장주원 선생은

옥공예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장인.

옥의 종주국임을 자처하는 중국의 전문가들조차 그의 실력에 감탄하고,

그의 작품에 경의를 표한다.


하루 스무 시 간씩 작업했던 젊은 시절의 노력은 그에게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실력을 부여했고,

옥원석을 찾아 시베리아를 누빈 그의 열정은 그의 작품에 가치를 더했다.


인산펌


2016.09.01.목.


나의서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