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踏山日時 :2013.05.26.일
2.踏山場所 :경기 화성시 안녕동 산187-1
3.現地日氣 :맑 음(초여름)
4.明堂의 特徵
1)物形論 :
2)明堂內歷(陰,陽宅) :정조는 추존 장조(사도세자)의 둘째 아들로 1776년 제21대 영조가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 직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천명하고 아버지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노력을 다했다.
문무를 겸비했던 정조는 규장각을 두어 학문 연구에 힘쓰고 장용영을 설치하고 수원 화성을 쌓는 둥
조선의 중흥을 이끌었다.또한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여 봉당정치를 폐해를 막기위해 힘썼다.
효의왕후는 좌참찬 청원부원군 김시묵의 딸로 1762년 세손빈에 책봉되었고,정조의 어머니 혜경궁홍씨
를 지성으로 모셔서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3)入首龍 :
4)坐 向 :
5)破 口 :
5.踏山後記 :
•지정 번호; 사적 206호
•소재지;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1-1
•지정일; 1970년 5월 26일
•시대; 조선 순조 원년(1800), 순조 21년(1821)
•분류; 능원
•내용; 건릉은 조선 22대 임금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와 부인 효의 왕후(孝懿王后; 1753~1821) 김씨의 무덤이다. 정조는 영조의 손자이며, 아버지 사도 세자(思悼世子)와 어머니 혜경궁(惠慶宮) 홍씨 사이에서 1752년(영조 28) 맏아들로 태어났다. 1759년(영조 35) 세손(世孫)에 책봉되었고, 1762년(영조 38) 2월에 효의 왕후(孝懿王后)를 비로 맞아들였다. 정조는 이 해 5월에 아버지 사도 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고, 1764년(영조 40) 2월에는 아버지 사도 세자가 아닌 영조의 죽은 맏아들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후사로 삼아 종통을 이어야 했다. 1775년(영조 51) 12월에는 왕의 병이 깊어지면서 세손인 정조에게 대리 청정을 명하였는데 좌의정(左議政; 정1품) 홍인한(洪麟漢)의 방해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홍국영(洪國榮) 등의 도움으로 여러 차례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1776년 3월에 영조가 죽자 마침내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정조는 즉위하면서 어머니 혜빈(惠嬪)을 혜경궁으로 높이는 한편, 생부인 사도 세자의 존호를 ‘장헌 세자(莊獻世子)’로 높이면서 묘소를 ‘수은 묘(垂恩墓)’에서 ‘영우원(永祐園)’으로 격상시키고 ‘경모궁(慶慕宮)’이라는 묘호를 내리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자신의 왕통에 관계된 것들을 정리한 정조는 이어서 홍인한․정후겸(鄭厚謙) 등을 사사하고, 그 무리 70여 명을 처벌하였다. 정조는 이 과정에서 그들의 죄상을 하나하나 밝힌 《명의록(明義錄)》을 짓기도 하였다. 한편 정조는 즉위와 동시에 본궁을 경희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고 그 후원에 주합루(宙合樓)와 여러 서고 건물들을 지으면서 규장각(奎章閣)을 마련하여 문치의 왕정을 펼 준비를 다졌다. 이후 정조는 영조의 탕평론을 이어받아 왕정 체제를 강화하여 위민 정책을 실현시키는데 노력하였다. 그는 재위 3년째에 모든 신분적 차별의 단서들을 철폐하여 누구든 억울한 일은 무엇이나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그것들을 자신이 능행할 때에 접수하도록 하였는데 《정조실록(正祖實錄)》과 《일성록(日省錄)》에 실린 상언․격쟁의 건수만도 5,000건이 넘을 정도였다. 1789년(정조 13)에 아버지 사도 세자의 능을 수원으로 옮기면서 능행의 범위를 한강 남쪽까지 확대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화성을 새로 쌓으면서 수원 도호부(水原都護府)를 옮기고 본래의 자리에 현륭원을 만드는 한편, 이곳에 행궁을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정조는 배다리를 만들어 한강을 건너면서 모두 10여 차례에 걸쳐 현륭원으로 행차하기도 하였다. 이때 정조는 한강의 상인들에게 전라도 조세 운송권의 일부를 주면서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배를 각 창별로 분속시켜 배다리를 만들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785년(정조 9)에는 역대 법전들을 모아 《대전통편(大典通編)》을 편찬하여 법치의 기반을 다지기도 하였다. 또한 1791년(정조 15)에는 신해 통공(辛亥通共)이라는 조치를 내림으로써 시전 상인들의 특권을 없애기도 하였다. 이는 도시로 모여든 이농 인구가 중소 상인으로 자리 잡아가자 상업 활동에 균등한 기회를 부여하려는 목적으로 단행되었다고 한다. 재위 기간 동안 규장각을 통해 방대한 양의 저술 사업을 전개하였다. 역사서, 지리서, 축성에 관한 것, 왕조의 의례 관계에 관한 것들뿐만 아니라 영조 때 편찬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증보하여 《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를 편찬하였다. 이외에도 규장각 각신들로 하여금 중요 정사를 매일 기록하도록 함으로써 《일성록》을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1781년(정조 5)에는 강화도 외규장각을 설치하여 역대 왕실 의궤들의 원본을 안치하여 영구 보전을 꾀하기도 하였다. 한편 1791년(정조 15)에는 윤지충․권상연 등이 제사를 거부하고 가묘의 신주를 불사른 사건이 발생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주장하는 소리가 높아졌지만 정조는 정학을 신장하면 사학은 저절로 억제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윤지충․권상연 두 사람만 처형하면서 천주교 자체에 대한 탄압을 자제하기도 하였다. 정조는 영조와는 다른 측면에서 아버지 사도 세자에 대한 비통한 심정을 평생 지니고 살았다. 현재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문화유산의 하나인 수원 화성(사적 3호)은 아버지 사도 세자의 묘역을 새로 조성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1799년(정조 23)에 아버지 사도 세자의 저술을 손수 편집하여 예제(睿製) 3책을 남긴 정조는 자신의 저술․강론 등을 규장각 각신에게 편집하도록 명하여 《홍재전서(弘齋全書)》 100권으로 정리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6월 재위 24년 만에 49세로 일생을 마쳤다.
효의 왕후는 본관이 청풍(淸風)이며, 좌참찬(左參贊; 정2품) 청원 부원군 김시묵(金時黙)의 딸로 1753년(영조 29) 12월 서울에서 태어났다. 1762년(영조 38) 10세 때 세손빈(世孫嬪)에 책봉되고, 장조(莊祖)의 비 혜빈(惠嬪) 홍씨를 잘 섬겨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고, 슬하에 소생이 없어 1790년(정조 14) 수빈(綏嬪) 박씨가 아들을 낳자 왕세자로 삼았다. 천성이 공손하고 온후하여 60세가 넘어서도 영조의 계비 정순 왕후(貞純王后)와 혜빈 홍씨를 공양하여 칭송을 받았다. 일생을 검소하게 지냈으며, 수차에 걸쳐 존호가 올려졌으나 모두 거절했고, 1820년(순조 20) 70세가 되어 여러 대신들이 잔치를 베풀고자 했으나 사양하였다.
건릉은 사도 세자의 현륭원(顯隆園) 동쪽 언덕에 있었으나 효의 왕후가 죽자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서쪽으로 옮기기로 하고 효의 왕후와 합장하였다. 무덤은 한 언덕에 2개의 방[동릉 이실(同陵異室)]을 갖추었으며 병풍석 없이 난간만 두르고 있고, 그 외의 모든 것은 융릉의 예를 따랐다. 혼이 앉는 자리인 혼유석이 하나만 있으며, 융릉과 같이 팔각형과 사각형을 조화시켜 석등을 세웠다. 문무석은 사실적이며 안정감이 있는 빼어난 조각으로 19세기 무덤의 석물 제도의 새로운 표본을 제시하였다. 정조의 융릉과 함께 동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6.현장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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