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산(踏山)/仁 山 風 水 踏 山 記

高 山 書 院 -(고산서원)

仁山 -세발낙지 2011. 6. 13. 11:28

高 山 書 院(고산서원) 

1. 踏 山 日 時  : 2011.06.12.일

2. 踏 山 場 所  : 장성군 진원면 진원리 257번지

3. 現 地 日 氣  :  초여름날씨

4. 明 堂 의 特 徵  

  1) 物 形 論  : 연꽃모양의 화심

  2) 明 堂 內 歷( 陰, 陽 宅)   성리학 대가 노사(盧沙) 기정진의 자취 서린 곳

공리공담의 성리학을 뛰어넘어 깨우침을 실천으로 옮긴 학자 노사(盧沙) 기정진(奇正鎭17981876).
장성 진원면 진원리에 있는 고산서원은 노사가 학문을 마무리하고 제자들에게 학문을 전한 뒤 세상을 떠난 곳이다
. 노사는 이 곳에 담대헌(澹對軒)’이라는 강학소를 짓고 거기에서 거처하며 저작활동을 하고 제자를 가르쳤는데 그의 문집 <담대헌기>에는 그가 이곳으로 이사 온 이유가 나와 있다.
담대헌 마루에 올라 앉으면 아스라이 무등산이 보이고
, 무등산 자락의 장망봉도 보이는데 그 곳에는 노사의 부모님 묘소가 있다. 늙은 나이와 병으로 성묘가 어려웠던 노사는 이 곳에서나마 부모님 묘소를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기에 담대헌이라는 이름을 걸고 살았던 것.


노사는 글을 쓰면 줄이 반듯하지 않았다
. 어려서 천연두를 앓아 한 쪽 눈을 잃고 한 눈으로 책을 읽고 글을 썼기 때문이다. 평생 병마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40대에는 다리병을 얻어 걷기도 힘들었다. 그는 가난하였으나 가난한 삶을 달게 여기며 강학에 힘썼다. 그에게 직접 배운 제자만 594명에 이르고 전국 각지에 4000여 명에 달하는 제자를 뒀다. 호남뿐만 아니라 경상도에서까지 제자들이 몰려든 이유는 그가 붕당을 공개적으로 비판했기 때문이다. 학문에 있어서나 사람을 대할 때나 포용의 아름다움을 발휘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굴곡이 있을 때마다 죽음을 겁내지 않는 상소를 올렸던 그는 자신의 철학을 몸으로 실천했던 탁월한 성리학자였다.


노사는 관직에 연연하지 않은 당대 재야 유학자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 40여 차례 벼슬을 사양했으며 벼슬에 나간 것은 6일에 불과하다. 벼슬살이를 멀리하고 오로지 진리탐구에 일생을 바치면서도 세상에 할 말을 던졌다. 조선후기의 병폐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다산 정약용이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제시한 것들을 따라야 한다고 했던 사실에서 그가 공리공론의 이론가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군포(軍布)환곡(還穀)의 폐지와 함께 서원 유생의 해독을 없애야 한다는 등 과감한 전면 개혁론을 주장한 학자이며 위정척사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학문으로는 장성만한 곳이 없다)’. 흥선대원군은 조선 팔도를 평하면서 호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조선 성리학의 6대가 중 한 사람인 노사를 두고 한 말이다.


유명한 일화가 있다. 청나라 사신들이 조선의 학문을 시험해보기 위해 시의 대구를 맞추라는 수수께끼를 냈다. 쩔쩔매던 조정의 대신들이 노사에게 물었고, 그는 단박에 명쾌하게 해석해 시를 써 보냈다. 이를 읽어 본 중국 사신과 조정 대신들이 남긴 말이 장안만목 불여장성일목(長安萬目 不如長城一目)’이다. 서울의 수많은 사람들이 장성 고을의 눈 하나 없는 사람보다 못하다는 뜻이다.


고산이 가장 오래 거주하면서 저술활동과 강학을 했던 중심지는 하사리(장성군 황룡면 장산리)였다. 그러나 지금 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때문에 고산서원은 노사 기정진의 자취를 명확하게 찾아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성리학의 6대가, 20세기 초 근세유학의 3대가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대학자의 유적이다.

  3) 入 首 龍  :  乾 亥 龍

  4) 坐  向   亥 坐 巳 向

  5) 破   :  左 旋 水  -  丙 午 破

5. 踏 山 後 記  :  본체뒤로는 논이 있어서 약간 습한 느낌이 들고 발길이 끊어졌는지 관리상태가 별로다.

                           예전에 다녀간 박교수님에 따르면 항상 문을 잠궈놓고 사람의 출입을 통제했다고 한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원래 사람발길이 닿아야 오래 보존이 되는데,그리고  이런 자리에서는 첩자식이 잘된다고 하니..

                            더 연구해볼 필요가 있을것으로 사료됨. 반개,화                            

 

6. 현 장 사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