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踏山 日時 : 2010.06.13.일.08시
☞踏山 場所 : 백제 도읍지 웅진에서
☞踏山 州所 : 충남 공주시 금성동 산5-1(옛지명:송산리)
☞命堂 特徵 : 삼국시대 분묘중에서 최초로 주인공이 확실한 묘로 학계의 큰 자료가 되었으며,
풍수적으로 길자라고함,(다른릉은 도굴되어 없어졌지만 이곳에서는 금관,금팔찌,
금귀고리 등 유물이 다량 발굴되였다고 합니다.)
☞陰,陽宅內歷 :백제 25대 무령왕릉의 묘소와 송산리 고분군(1971년 발굴된 벽돌 무덤)
☞踏山 後記 : 이번 답산은 충남공주로 계획을 세워 무령왕릉,전의이씨,인당박동진명창전수관,
연평부원군 이귀,숭선군등등 돌아볼 계획으로 답산은 떠난다.왕릉이라서 그
런지는 모른지만,용맥의 힘찬기운도 좋지만,안산이 거북모양에 문필봉으로 너무
아름답다.무령왕릉(武寧王陵)은 공주 송산리 고분군이 7번째 발견된 고분이며,
백제 무령왕과 왕비의 능이다.1971년7월7일 처음 발굴되었다, 지석이 발견되어
축조연대를 분명히 제시해 주었기 때문에 삼국시대 고고학 편년연구에 기준자료가
되고 있으며,국보로 지정된 금제관식,금제뒤꽂이,금제심엽형이식(귀걸이),지석,석수
청동신수경 등을 포함하여 총2900여 점의 많은 유물이 출토 되었다,무령왕릉을 포함
한 공주 송산리 고분군은 사적13호로 지정되어 있다.
☞踏山 地圖
☞踏山 사진
무령왕릉과 고분군 모습
송산리 5호분 내부모습
송산리 5호분 천정
송산리 5호분 내부 천정과 맞다는 바닥모습
송산리 5호분 내부 벽돌에 여러문양들
공산성
정지산 유적
송산리 6호분의 내부모습
송산리 6호분 내부 벽돌에 새겨진 문양들
백제 25대 무령왕릉 내부모습(구조)
무령왕릉은 송산리(宋山里) 제5, 6호분과 서로 봉토(封土)를 접하고 있다. 송산리 고분의 1~5호분은 깬돌을 쌓아 만든 반원 굴식 돌방무덤이며, 6호분과 무령왕릉은 굴식 벽돌무덤이다. 돌방무덤은 한성도읍기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무덤 양식이며, 벽돌무덤은 6세기초 중국 남조 양(梁)나라로부터 들여온 무덤양식이다. 봉분의 윗부분은 지름 약 20m의 원형 구모양을 가지며 널방(墓室)의 바닥면에서 무덤 꼭대기까지 7.7m이다. 널방은 연화무늬 벽돌과 글자가 새겨진 벽돌 등으로 쌓여진 하나의 방으로 평면 4.2m×2.72m의 크기인데 북으로 축선(軸線)을 둔다.
천장은 아치 모양이며 바닥면으로부터의 최고값은 2.93m이다. 벽면에는 제6호분과 똑같은 모양의 소감(小龕)과 그 아래에 연꽃모양 창모양으로 된 것을 북쪽 벽에 1개 동·서벽에 각각 2개를 만들고 각 감내에는 등잔이 들어간다. 출토된 유물은 백제고분으로서 전례없을 정도로 풍부하고 화려하다.
무령왕릉 내부입구
백제 25대 무령왕릉 내부를 설명하고 있는 해설사
백제 25대 무령왕릉 내부 천정모습
무령왕릉 석실 내부에 등잔 모형과 중방(지금 창문형식)
백제 25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들(왕의 금제관식)
무령왕비 금제관식
무령왕릉에서 나온 목관(모조품)
왕비의 평상복
열심히 설명하고 계시는 왕릉 해설사님
무령왕릉의 현실 단면도
석수
왕무덤 앞에서 대문을 지키는 수호신이지 않았을까 ???
- 널길의 입구 중앙에 밖을 향하여 놓여 있었으며 재료는 응회암제이다. 뭉뚝한 입을 벌렸고 코는 크나 콧구멍은 없고 높은 콧등날이 등뒤까지 계속되었고 그 좌우에 눈과 귀가 있다. 등에는 불룩 튀어나온 긴 무늬가 네 곳에 있고 머리 위 융기 위에는 철제의 나뭇가지모양의 뿔이 패어진 홈에 꽂혀 있다. 몸통 좌우에는 앞뒤에 날개모양 갈기가 새겨져 있다. 출토 당시부터 오른쪽 뒷다리는 파손되어 있었다. 이 석수는 중국 한 대(漢代)이래 악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뜻으로 무덤내부 앞에 세우는 진묘수(鎭墓獸)의 일종이다.
- 국보 162호로 지정되어 있다.
묘지석 - 간지도와 매지권
- 국보 163호로 지정되어 있다.
- 지석이 발굴되어 백제 무령왕의 무덤임을 알 수 있었다. 지석은 왕릉의 널길 입구에 놓여 있던 2장의 장방형 돌판이다. 가로 41.5cm, 세로 35cm, 두께 5cm 의 청회색 석록암에 해서체로 글을 새겼다.
- 무령왕이 523년에 죽고 3년상을 치르기 위하여 2년 3개월간 가매장하였다가 왕릉에 안치할 때 왕의 묘지와 간지도, 매지권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후 526년에 왕비가 죽자 3년상을 치른 후 529년에 안치할 때 매지권을 상하로 뒤집어 뒤편에 왕비의 묘지를 새겼다. 이 지석은 우리나라 지석 중 가장 오래 된 것일 뿐만 아니라 이 지석이 출토됨으로써 무령왕릉은 삼국시대의 왕릉 중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무덤이 되었다.
- 매지권 : 무령왕릉 지석 뒷면에는 무령왕이 토지신에게 돈 1만닙를 주고 능을 만들 땅을 사게 되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토지매매 문서를 작성한 것이다. 또한 중국 돈인 오수전을 그 위에 올려놓은 것으로 보아 오늘날과 유사한 화폐거래를 통한 토지 매매를 유추할 수 있다.
“ 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 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 丙戌朔 七日壬辰 崩到
乙巳年八月 癸酉朔 十二日甲申 安登冠大墓 立志如左”
- 왕의 지석 해석
-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는 계묘년 5월 7일 임진날에 돌아가셔서, 을사년 8월 12일 갑신날에 이르러 대묘에 예를 갖추어 안장하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
- 왕비의 지석 뒷면 해석
- 돈 1만닙, 다음의 건. 을사년 8월 12일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앞에 든 돈으로 토지신 토왕, 토백, 토부모, 연봉 2000석 이상의 여러 관료에게 나아가서 서쪽 땅을 사들여 묘을 만들었으니 문서를 만들어 남긴다. 현 율령에 따르지 않는다.
무령왕 생애와 치적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로 분주하다
무령왕릉과 송산리 고분군 외부모습
송산리 5호분 입구
송산리 6호분 입구
백제 25대 무령왕릉 입구
무덤위에 통풍구도 보인다(온도 및 습도 조절을 위해)
왕릉 앞 안산이 문필봉으로 아주 아름답다.
무령왕릉 앞 안산이 거북모양과 문필봉으로 아주 수려하고 아름답다.
송산리 1~4호분에서 내려다 본 공주시내
여인네 가슴처럼 아름답게 가꾸어진 品자형 묘지형태
관리가 잘 된 송산리 무령왕릉과 고분군
여유로운 패밀리
나의 영원한 동반자 인산 - 亨瑃
이 번 답사에 참석하신 교수님을 비롯한 답사팀
관광객 쉼터
백제의 웅진과 사비가 살아나라
송산리 무령왕릉과 고분군의 답사를 마치고,
공주 국밥이 유명하다고 해서 찿은 새이학가든
손님은 많은데 불친절하다.
여기저기 유명한 손님들 사진은 많이 붙여놓고
대접은 소홀이 하면 적덕과적선이 될련지 ....?
의문이 가는 대목이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맛은....!!!
그래도 우리것이 좋은 것이여.....
최고여...
'^*^----명 산(踏山) > 仁 山 風 水 踏 山 記'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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