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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찿아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더라.

仁山 -세발낙지 2010. 1. 17. 12:57

 

허난설헌 찿아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더라.

▲ 허난설헌 시비(詩碑)
ⓒ 이정근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시인으로 칭송받고 있는 난설헌 허초희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허난설헌의 문학과 삶의 궤적을 추적하면서 그녀가 잠들어 있는 곳을 찾아가보고 싶었다. 관련 서적과 인터넷을 뒤져도 주소 이외에는 찾아가는데 도움이 될만한 정보가 없었다.

해당 지방자치단체 광주시 문화체육과에 전화를 걸었다. 허난설헌 묘를 찾아가야 하는데 위치 설명을 부탁드린다고 했더니, 허난설헌이라는 호칭을 낯설어 한다. 몇 사람의 손을 거쳐 담당자라는 사람이 설명해주는데 관내 거주민이나 알아들을 수 있는 지역 명칭을 섞어가며 안내해준다.

길 모르는 나그네가 쉽게 찾아갈 수 있었으면

장황한 길 안내 끝에 홈페이지에 나와 있으니 찾아보란다. 길을 묻는 나그네에겐 나그네의 입장에서 나그네가 쉽게 찾아갈 수 있도록 가르쳐 주어야 하는데 자상한 행정 서비스가 아쉬웠다. 홈페이지를 뒤졌다. 세계 도자기 엑스포나 분원 붕어찜 축제 그리고 퇴촌 토마토 축제, 유서 깊은 노거수 등은 명승지로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는데 허난설헌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찾지 못하고 다시 전화를 걸어 물었더니 포토뱅크에 있단다. 찾아들어갔더니 2002년도에 찍어서 올린 허난설헌 시비(詩碑) 사진 한 장이 달랑 있다. 아무런 설명도 없다. 이것이 오늘 현재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시인 허난설헌을 보는 이 시대의 시각이다.

▲ 도로표지판. 허난설헌 묘 가는 길도 표시했으면 좋겠습니다.
ⓒ 이정근
호주제가 폐지되고 동성동본 금혼이 옛 이야기가 되어버린 남녀평등 시대에 여류시인 허난설헌을 바라보는 태도가 이러 할진데 지금으로부터 440년 전. 숨소리마저 제대로 내지 못하고 숨죽여 살아야했던 남성 우위의 조선 사회에서 여자로 태어난 허초희가 시(詩)를 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기방(妓房)문학은 있지만 규방(閨房)문학은 없다는 남존 여비의 조선 사회에서 27세의 꽃다운 나이에 한 많은 생을 접은 허난설헌이 잠들어 있는 곳을 찾아 무작정 길을 나섰다. 초월면 지월리라는 지명이 있으니까 찾을 수 있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에 중부고속도로에 올라갔다.

20여분 달린 후 경안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좌회전 무조건 광주시내로 들어갔다. 시내에서 몇 사람을 붙잡고 허난설헌을 물으니 모른단다. 허난설헌이라는 물음 자체가 생경스럽다는 반응이다. 그렇다면 지월리는 어디냐고 물으니까 저쪽으로 해서 다리를 건너가면 지월리란다. 지월리에 진입하여 제일 큰 부동산에 차를 세웠다.

영양가 없는 질문은 귀찮다는 부동산 업자

“지월리에 허난설헌 묘가 있다는데 어디쯤 될까요?”라고 물었더니 자기들도 서울 사람이어서 잘 모른단다. 하, 그렇구나. 경기도 광주에도 투기바람이 불어 떳다방들이 몰려와 있구나. 그제서야 자세히 살펴보니 무슨무슨 컨설팅, 무슨무슨 부동산이라고 적힌 간판들이 즐비하다. 길을 모를 때 복덕방에 가서 물으면 된다는 순진한 생각이 통하지 않은 투기의 열풍지대였다.

“그런 것은 우리는 잘 모르니 개울건너 마을회관에 가서 물어 보슈.”

몇 억을 가지고 있는데 마땅한 땅이 있어요? 라는 달콤한 얘기는 환영하지만 허난설헌은 돈이 되지 않은 상담이고 귀찮은 질문이라는 뜻이다. 마을회관 앞에 차를 세우고 길을 물었다. 나이 지긋한 마을 주민 몇 분이 계셨지만 역시 모른단다. 지월리만 들어가면 쉽게 찾을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이 걱정으로 바뀐다.

▲ 친절하게 길 안내를 해준 분이 운영하는 식당
ⓒ 이정근
“여기에서 이 길로 1.5km 정도가면 신토불이 라는 오리구이 식당이 있는데 그 집 주인이 그런 것은 조금 아니까 거기 가서 한번 물어 보세요.”

식당에 도착하여 주인을 찾았더니 시내에 볼일 보러 나가고 자리에 없단다. 막막하다. 주위를 살펴보니 사당도 갖추고 그런대로 괜찮게 가꾸어 놓은 묘역이 눈에 들어온다. 거기 일꺼라는 느낌이 든다. 약간 경사진 구릉을 가쁜 숨을 몰아쉬며 10여분 올라가 확인해보니 아니다. 허탈감과 함께 등에서는 땀이 흐른다.

내려와 식당에 들렀더니 마침 주인이 와 있었다. 허난설헌 묘를 찾아 가는데 여기에서 잘 아실 거라고 소개받고 왔다하니 그 역시 모른단다. 아득했다. 지월리만 들어가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난감해 하는 모습이 안돼 보였는지 잠깐 기다리라며 어디엔가 전화를 건다. 통화를 마친 후 손가락을 가리키며 설명해준다.

▲ 고속도로 둔덕 아래 서있는 허난설헌 묘 입구 표지석(왼쪽아래). 얼마 전엔 이보다 작은 세로로 된 작은 표지석이 있었답니다.
ⓒ 이정근
“여기에서 차를 돌려 2km 정도 뒤돌아 나가면 다리가 있어요. 그 다리를 건너서 삼육재활원을 지나면 고개가 있는데 그 고개가 파헤쳐져 있을 거예요. 그 땅이 바로 전 부총리 이아무개씨를 자리에서 내려오게 한 바로 그 땅이거든요. 그 고개를 지나면 동네가 나오는데 거기에서 좌회전하여 한참 가다보면 고속도로가 나와요. 그 고속도로 지하통로 직전에서 좌회전하면 거기에 있어요.”

너무너무 친절하다. 자기가 모르는 곳인데도 다른 곳에 전화하여 이렇게 자세하게 일러주니 고맙기 그지없다. 이해타산이 생활화 된 현대 사회에서 자신에겐 아무런 이익이 없으면서 자기 통화료 지불하며 위치 파악하여 이렇게 자세하게 가르쳐 준다는 것은 너무 고마운 일이다. 그 순수한 친절에 감사를 드린다.

차를 돌려 식당 주인이 가르쳐준 길을 찾아가니 고속도로 지하통로가 나온다. 통과하지 말고 좌회전하라는 식당 주인의 말을 상기하며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바로 옆 풀 섶에 높이 50cm정도의 허난설헌 묘 입구라는 비석이 잡초와 쓰레기 더미에 묻혀 있다. 주위를 살펴보니 가로 세로 50cm정도의 입간판이 전봇대에 매달려 있다.

▲ 강원도 강릉 초당동에 있는 허난설헌 생가
ⓒ 이정근
일곱 살 어린 소녀가 상상속의 하늘의 황제가 살고 있다는 백옥루를 연상하며 그 궁전을 건축하는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어 그녀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고, 우리나라 규방문학의 금자탑으로 일컬어지는 <규원가>(閨怨歌)를 지어 국문학사(史)에 길이 남을 족적을 남긴 허초희의 오늘의 위상이다.

주어진 시대의 모순에 순응하지 않고 시대를 앞서 나가며 남존여비를 당연시 하는 조선 사회를 통렬히 비판하는 작품과 환상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비단결 같은 불후의 작품을 발표하여 한중일 동양 3국에서 우뚝 선 여류 시인으로 추앙 받던 한국최초의 여류 시인 허난설헌의 오늘의 현주소다.

묘역에 들어서니 가파른 계단이 눈앞을 가로 막는다. 계단을 올라서니 허난설헌 시비(詩碑)가 우뚝 서 있다. 전면에는 사랑하는 아들과 딸을 가슴에 묻은 어미의 슬픔을 노래한 곡자(哭子)가 한글로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실제 하지 않은 환상의 세계를 노래한 그녀의 시 <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 전문이 원문과 한글로 음각돼있다.

▲ 허난설헌의 딸과 아들이 묻혀있는 애기무덤
ⓒ 이정근
사랑하는 딸을 지난해 보내고/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슬프고 슬픈 강릉의 땅이어/ 두 무덤 마주보고 나란히 서있구나/ 백양나무 가지에 소소히 바람 불고/ 도깨비 불빛은 숲속에서 반짝이는데/ 지전을 뿌려서 너희 혼을 부르며/ 너희들 무덤에 술잔을 붓노라/ 아! 너희 남매 가엾은 외로운 영혼아/ 생전처럼 밤마다 정답게 놀고 있으리/ 이제 또다시 아기를 낳는다 해도/ 어찌 능히 무사히 기를 수 있으랴/ 하염없이 황대의 노래 부르며/ 통곡과 피눈물을 울며 삼키리...

자식을 가슴에 묻은 어미의 슬픔이 절절히 배어 있다. 그녀의 시 곡자(哭子)다. 배 아파 낳은 자식을 땅에 묻을 때 얼마나 가슴이 쓰라렸을까? 더구나 친정아버지 허엽을 경상도 땅 상주에서 비명횡사로 여의고 딸을 가슴에 묻은 다음 해 아들 희윤이 마저 저세상으로 보내게 되니 억장이 무너졌을 것이다.

홀로 남동쪽을 바라보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녀의 묘 바로 옆에 애기 무덤 두 봉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그녀의 딸과 아들 희윤이의 무덤이다. 지하에서나마 자식을 가슴에 품고 있는 듯하다. 묘비에는 허난설헌에게 가장 큰 문학적 영향을 끼친 스승과도 같은 오빠이며 당대의 문장가인 허봉이 조카 희윤이를 기리는 <피어 보지도 못하고 진 희윤아>로 시작하는 시가 새겨져 있다.

▲ 김성립의 묘
ⓒ 이정근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가 봤다. 아직 피지도 않은 나이 15세에 맞이한 첫사랑이자 첫신랑인 명문가의 자손 김성립의 묘가 있다. 허난설헌 사후에 맞이한 부인과 합장한 묘다. 비석에는 정부인(貞夫人) 남양홍씨라고 적혀 있다. 묘하고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김성립의 첫 부인 허초희는 정부인 양천 허씨라는 묘비명을 달고 아래쪽에 묻혀 있고 상처 후 맞이한 부인과 함께 묻혀 있으니 말이다.

그럴 수 있으리라. 열다섯 어린 나이에 시집 와 아이 둘을 낳았으나 모두 다 애기 때에 죽고 장본인 허초희마저 스물일곱 젊은 나이에 요절했으니 후에 들어온 남양 홍씨에게서 자손이 번성했다면 그럴 수 있으리라. 그것이 당대의 윤리규범이고 사회 통념이라면 누구를 탓 하리오, 더더구나 한 집안의 일이요 문중의 관행이라면 왈가왈부 할 수 없지만 씁쓸한 감은 지울 수 없었다.

허난설헌은 1563년(명종18년)에 태어났고 신사임당은 1504년(연산10년)에 태어났다. 거의 동시대의 여인이다. 출신지역도 강릉이다. 여자이기에 신사임당은 시집 선영인 경기도 파주에 있고 허난설헌은 시댁 선영인 경기도 광주에 잠들어 있다.

▲ 신사임당 묘비
ⓒ 이정근
자운서원에 있는 신사임당은 남편 옆에 나란히 묻혀 있고 허난설헌은 남편과 떨어져 외로이 묻혀 있다. 두 여인의 차이점은 신사임당에게는 율곡이라는 걸출한 아들이 있었고 허난설헌에게는 없었기 때문이고 사임당은 그렇지 않았지만 허난설헌은 <홍길동전>의 저자이며 동생인 허균이 역모로 처형되는 등 친정이 몰락했기 때문이지 않느냐 라고 생각하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비단 폭을 가위로 결결이 잘라/ 겨울 옷 짓노라면 손끝이 시리다/ 옥비녀 비껴들고 등잔가를 저음은/ 등잔불도 돋을 겸 빠진 나비 구함이라

그녀의 묘와 김성립의 묘를 바라보는 순간 생각나는 그녀의 시 <야좌>(夜座)다. 숨 막힐 것 같은 시집살이의의 고단함속에서 이토록 아름다운 시를 읊을 수 있는 것은 선경(仙境)의 세계를 넘나들 수 있었던 그녀만이 그려낼 수 있는 절창이 아니고 무엇인가. 특히 마지막 두 줄. ‘옥비녀 비껴들고 등잔가를 젓는 것이 불꽃도 돋을 겸 빠진 나비 구함’ 이라는 절구는 오직 그녀만이 구사할 수 있는 절묘함이 아닐 수 없다.

▲ 허난설헌 묘비
ⓒ 이정근
기방에 파묻혀 사는 님을 그리며 기나긴 밤 독수공방으로 밤을 지새우다 등잔불 저음은불 속에 빠진 나비 한 마리 구함이라니…. 역시, 허난설헌다운 절창이다. 지아비를 하늘처럼 모셔야하는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안주인이 부군(夫君)을 바라보는 시각과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의 여인들보다 더 세련되고 더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자연인 허초희는 우리 국문학사에 길이 빛나는 시인(詩人) 허난설헌이다. 조선에서 출판 금지된 그녀의 작품이 중국 사신으로 조선을 방문한 주지번(朱之番)의 손을 거쳐 중국 명나라에서 출판되어 낙양의 지가(紙價)를 올리며 대륙을 흔들었고 그 출판본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열도(日本列島)를 뒤흔들었던 동양 3국의 여류 시인이다.

▲ 시비에 새겨진 몽유광산산에서 부용삼구타라는 구절이 뚜렸하다
ⓒ 이정근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 기대었구나/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하여라

묘역을 나서면서 시비에 새겨진 그녀의 시를 다시 살펴봤다. 그녀의 시 <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이다. 부용삼구타(芙蓉三九朶)라는 구절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나이 스물일곱 살 되던 삼월 열아흐레 날. 깨끗이 목욕하고 새 옷을 갈아입은 그녀가 “금년이 삼구에 해당하니 서리 맞은 연꽃이 붉게 되었구나” 라며 눈을 감았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삼구는 이십칠, 바로 그녀의 나이 이십칠 세가 아닌가

허난설헌은 작품으로 평가받고 허초희는 자연인으로 대접받아야

광상산은 바로 난설헌이 살고자했던 이상 세계였는지 모른다. 여기 잠들어 있는 그녀는 아직도 상상의 세계를 배회하며 환상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 모르겠다. 주어진 시대의 모순에 순응하지 않고 시대를 앞서 나가며 살아야 했기에 비난을 감수해야 했으며 평탄하지 못한 삶을 살아야했던 그녀.

죽은 이후에도 남성 사회의 본류 조선(朝鮮) 선비들로부터 폄하와 비판으로 얼룩진 그녀의 작품은 위작과 표절로 매도되었다. 416년이 지난 현재에도 그녀의 작품과 인간 허난설헌은 완전한 명예회복을 이루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그녀가 잠들어 있는 묘역에선 안동김씨 서운관정공파 재실 공사가 한창이지만 하루 빨리 허난설헌 그녀의 작품이 제대로 평가받고 자연인 허초희가 대접받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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