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515호…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전 국민의 숨소리까지 검열하는 군부 독재가 기승을 부리던 1985년 9월 4일,
민주화운동가 김종태는 가족들과 목욕탕을 다녀오던 길에 경찰에 연행된다.
예전부터 자주 경찰에 호출되었던 터라 큰 일은 없으리라 여겼던 그는 정체 모를 남자들의 손에 어딘가로 끌려간다.
눈이 가려진 채 도착한 곳은 남영동 대공분실.
경찰 공안수사당국이 ‘빨갱이’를 축출해낸다는 명목으로 소위 ‘공사’를 하던 고문실이었다.
그날부터 김종태는 온갖 고문으로 좁고 어두운 시멘트 바닥을 뒹굴며 거짓 진술서를 강요 받는다.
아무 양심의 가책 없이 잔혹한 고문을 일삼는 수사관들에게 굽히지 않고 진술을 거부하는 김종태.
하지만 ‘장의사’라 불리는 고문기술자 이두한이 등장하면서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꾸는 잔혹한 22일이 시작된다.
주연
출연
명계남 박전무 역 김의성 강과장 역 서동수 백계장 역 이천희 김계장 역 김중기 이계장 역
특별출연
故김근태는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장의사집 둘째 아들'로 통하는 고문 기술자 이근안에게 모진 고문을 당했다.
전기와 물이 그의 몸을 할퀴고 지나갔다.
이후 그는 남은 생을 정신적 육체적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다.
이 잔혹한 고문을 고발하는 김근태의 진술이 이미자의 '노래 테이프' 중간에 녹음된 채 미국인권단체에 건네지면서,
남영동 대공분실의 존재는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이로써 김근태는 '세계 양심수'로서 1987년 로버트 케네디 국제인권상을 받았지만,
그를 가두고 고문했던 국가보안법은 27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건재하다.
그는 자신의 책 <남영동> 에서 '인간도살장' 안에 갇혔던 느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고문을 할 때는 온 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고문대에 뉘면서 몸을 다섯 군데를 묶었습니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 고문이 잘 되게 하기 위해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습니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가면서 전기 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 앞에 다가왔습니다.
이때 마음속으로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는
노래를 뇌까리면서 과연 이것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했으며 이런 비인간적인 상황에 대한 절망에 몸서리쳤습니다."
故김근태 상임고문의 자전적 수기<남영동>中에서
故 김근태
1947년 2월 14일생- 2011년 12월 30일 사망
1965년 서울대 경제학과 입학
1971년 박정희 정권 부정선거 파동 반대 활동, 교련 데모에 적극 참여.
서울대 내란 음모 사건으로 수배
1985년 8월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이적단체로 구속
1985년 9월 22일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당함
1987년 김근태&인재근 부부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수상
1988년 87년 6월 민주 항쟁 이후 석방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결성을 주도하고 정책기획실장, 집행위원장
1995년 민주당 입당
1996년 15, 16, 17대 국회의원
2004년 7월-2005년 12월 노무현정권 보건복지부 장관
2006년 열린우리당 최고위원 및 당 의장
2007년 고문 후유증 파킨슨병 진단
2008년 민주당 상임고문
2011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2011년 12월 30일 뇌정맹혈전증 2차 합병증으로 별세
2012.11.22.프리머스에서.....
'^*^----인 산 > 仁山 작은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섬진강 여행길 따라.... (0) | 2012.12.04 |
---|---|
무안 오승우 미술관 (0) | 2012.11.26 |
늑대소년 (0) | 2012.11.12 |
가을을 말하다 (0) | 2012.10.31 |
2012' 제2회 대한민국한옥건축박람회 (0) | 2012.10.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