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산(踏山)/조선왕릉답사(44기)

동구릉과 건원릉(조선제1대 태조이성계)-단릉

仁山 -세발낙지 2011. 6. 19. 11:56

 

동구릉

 

 

 

  • 1대 태조(太祖)
  • 능호 : 건원릉
  • 위치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4-2
  • 지정번호 : 사적 제193호
  • 조성시기 : 1408년(태종8) 9월 9일
  • 능의구성
  • 건원릉은 조선 1대 태조의 능으로, 조선 왕릉 제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 능제는 전체적으로 고려 공민왕의 현릉을 따르고 있으나, 고려 시대에는 없던 곡장을 봉분 주위에 두르는 등 세부적으로 석물의 조형과 배치 면에서 일정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석물의 조형은 남송 말기의 중국풍을 거의 따르고 있다.
  • 봉분에는 다른 왕릉들처럼 잔디를 심지 않고 억새풀을 덮었는데, 고향을 그리워하는 태조를 위해 태종이 고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덮어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높고 웅장한 봉분의 아래 부분은 다양한 문양을 새긴 12면의 화강암 병풍석이 둘러싸고 있다. 병풍석에는 열 두 방향의 악재로부터 왕릉을 보호하기 위해 십이지신상을 새겼다. 병풍석 밖으로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고, 난간석 밖으로는 석호와 석양이 네 마리씩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석호와 석양은 왕을 지키는 영물들로, 밖을 향하여 언제든지 방비할 수 있는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다.
  • 봉분 앞에는 혼유석이 있는데, 혼유석 밑에는 도깨비가 새겨진 북 모양의 고석 5개가 놓여 있다. 한 단계 아래쪽에는 장명등과 석마 한 필씩이 딸려 있는 문석인이 놓여 있고, 그보다 더 아래쪽으로는 무석인과 석마가 양쪽에 놓여 있다.
  • 능의역사
  • 1408년(태종 8) 태종은 1대 태조의 건원릉을 조성하였다. 태조는 1408년 5월 24일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승하하였다. 그해 6월 12일 검교 판한성부사 유한우, 전 서운정 이양달, 영의정 하윤 등이 원평, 봉성, 행주 등의 길지를 후보지로 내세웠으나 채택되지 못하였고, 6월 28일 지금의 구리시인 양주의 검암에 산릉지를 정하였다.
  • 7월 5일에 충청도에서 3,500명, 황해도에서 2,000명, 강원도에서 500명 등 총 6,000명의 군정을 징발하여 7월 말을 기하여 산릉의 역사를 시작하게 하고 석실을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는 9월 7일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빈전에 나아가 견전례를 행하고 영구를 받들어 발인하였다.
  • 태조는 생전에 계비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해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에 자신의 묏자리를 마련해두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태종은 부왕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신덕왕후의 능을 도성 밖으로 이장하고, 태조의 능을 지금의 자리에 조성하였다.
  •  

     

     

     

     

     

     

     

    • 건원릉 억새풀이야기 
    • 건원릉 억새풀이야기
    • 건원릉 억새풀이야기
    • 돌보지 않은 듯한 태조의 능
    • 건원릉을 제외한 다른 조선왕릉의 봉분은 푸른 잔디가 덮여 있으며 반듯하게 손질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조선을 세운 태조의 위엄있고 웅장한 건원릉에는 언뜻 보면 마치 한동안 손보지 않아 잡초가 무성한 것으로 여겨질 만큼 잔디가 아닌 억새풀이 무성하다. 왜 그럴까? 『인조실록』1629년(인조 7) 3월 19일의 첫 번째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푸른 잔디가 아닌 억새풀을 사초한 건원릉 봉분
    • 능의 사초를 손대지 않은 다른 뜻
    • 동경연 홍서봉이 아뢰기를,
    • “건원릉 사초(莎草 : 무덤에 잔디를 입히는 것)를 다시 고친 때가 없었는데, 지금 능에서 아뢰어 온 것을 보면 능 앞에 잡목들이 뿌리를 박아 점점 능 가까이까지 뻗어 난다고 합니다. 원래 태조의 유언에 따라 고향의 억새풀을 사초로 썼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다른 능과는 달리 사초가 매우 무성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무뿌리가 그렇다는 말을 듣고 어제 대신들과 논의해 보았는데, 모두들 나무뿌리는 뽑아버리지 않으면 안 되고, 사초가 만약 부족하면 다른 사초를 쓰더라도 무방하다고들 하였습니다.”
    • 하니, 상이 이르기를,
    • “한식(寒食)에 쑥뿌리 등을 제거할 때 나무뿌리까지 뽑아버리지 않고 나무가 큰 뒤에야 능 전체를 고치려고 하다니 그는 매우 잘못된 일이다. 지금이라도 흙을 파서 뿌리를 잘라버리고 그 흙으로 다시 메우면 그 뿌리는 자연히 죽을 것이다. 예로부터 그 능의 사초를 손대지 않았던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였던 것이니 손을 대서는 안 된다.”
    • 고향땅에 잠들고 싶었던 조선의 창업주
    • 인조의 언급에서처럼 태조의 건원릉에 잔디가 아닌 억새풀이 덮여있는 까닭은 태조의 특별한 유언 때문이다. 태조는 조선을 건국하는 위업을 이뤘지만, 그 후 왕자들이 형제간의 살육을 마다하지 않으며 벌이는 권력 다툼을 겪는 등 무거운 마음의 짐을 안은 채 말년을 보내야 했다. 승하하기 전 태조는 왕 이전의 한 사람으로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고향 땅의 흙과 풀 아래 잠들고 싶은 마음을 유언으로 남긴 것이다.

     

     

     

     

     

     

     

    [1]. 건원릉을 명당이라고 생각하는 이유 

    (1), 무학대사가 소점한 곳이다
    건원릉과 무학대사의 관련에 대해서는 이미 본 홈페이지에서 자세히 거론한바 있으므로 참조 바란다.

    (2), 건원릉의 외형
     

    건원릉을 처음 접하면 높다란 구릉에 앉은 그 위풍당당한 모습에 압도당하게 된다.
    그리고 능에 오르면 많은 산들이 발아래 펼쳐진 광경에 또 한 번 감탄하게 된다.
    과연 한 나라를 세운 임금이 묻힐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앞서다보면 누구라도 명당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
    는 것이다
    그래서 웅장하고 화려한 이곳을 將軍大座, 日月相抱, 猛虎出林, 渴龍飮水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실제 명당의 공통점을 볼 것 같으면 이곳 건원릉보다는 작지만 일정한 덩어리 岡을 형성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기가 한 곳에 강하게 응축되면 통통하고 깨끗한 덩어리를 만들게 되니, 이를 옛사람들은 山之花也라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통통하고 매끈한 岡의 모습이 인작이 아닌 천연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眞穴은 당판을 만들고 그 남은 기운으로 전순을 만들기 때문에 길쭉한 타원형의 형태가 되어야 한다
    실제로 사진에서 보는 이석형묘소, 김 반 묘소, 김성우장군 묘소, 김 징 묘소 등은 좌우 폭 보다는 상하의 길이
    가 긴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건원릉을 비롯한 모든 왕릉은 매우 동그란 모습을 하고 있는데, 왕릉을 조성할 때 그 위엄 때문에 각별
    하였음을 감안한다 해도 건원릉은 혈이 갖추어야할 외형에서 석연치가 않은 것이다 


    [2]. 건원릉의 龍穴砂水

    보다 구체적으로 건원릉의 장단점을 살펴보겠다.

    1, 주산
    백두산-한북정맥-백운산-수락산-불암산-검암산-건원릉
    건원릉까지의 산의 흐름을 표기하고 있는데, 산경표를 보듯이 산의 족보를 나열하는 것이 불과 3평 남짓한 혈
    처를 감정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는지 모르겠다.
    풍부한 상상력으로 크고 멀리 보는 것은 능하지만, 미시적 살핌에는 소홀히 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


    古云 : 遠龍雖美不可恃也
    (멀리 있는 용이 비록 아름답다 할지라도 믿고 의지함은 불가하다)


    어느 묘소를 감정하고 평가함에 있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묘소까지 이어지는 봉우리이다.
    그 봉우리를 모체주산이라 하는데, 혈을 맺고 품어주는 직접적인 주산인 것이다.
    그런데 건원릉의 모체산은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B에서 시작되는데, A와 C에 끼여서 매우 옹색한 모습을 하
    고 있으니 주산이 좌우 護從砂에 핍박받는 모습이다
    혈은 산의 지존인 것인데, 시작부터 모체산이 혈을 품을 만한 능력과 자질이 의심스럽다 하겠다 

            



    2, 龍勢
    혈의 생성과정을 고서에서는 父母~~胎~~息~~孕~~育이라 한다
    父母는 모체산이고 胎는 과협에 이르기 직전의 용세이며, 息은 과협처, 孕은 入首(현무정)를 뜻하며 育은 당판
    을 말함이다
    이곳 건원릉은 이러한 과정을 질서 있게 충족시키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히 순서를 공식적으로 나열함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부분 부분이 일정한 원칙과 기준을
    지켜야 한다는 점이다
    그 중 한 과정인 胎는 깨끗해야 좋은 것인데, 이곳은 골이 많아 매우 지저분한 형태를 하고 있다
    주산이 초라하니까 그곳에서 파생된 맥조차 비루한 것이다




    3, 과협


    이곳은 약 30m 정도의 長峽이다
    이러한 경우는 반드시 鶴膝이나 泡가 있어서 생동감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어 축 늘어진 상태다

    峽者 龍之眞情發現處也 (과협은 용의 참 모습이 나타나는 곳이다)

    過峽宜狹不宜闊 長則力弱氣已殘
    (과협은 의당 좁아야 하며 넓은 것은 마땅치 않다
    긴 것은 힘이 약함이며 氣가 이미 쇠잔함이다)

    父母山과 胎의 불리함이 息(과협처)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음이다





     


    4, 당판
    과협을 지난 용세는 높직한 봉우리를 형성했다
    이를 玄武頂 또는 孕이라 부르는데, 이곳에는 풀이 전혀 자라지 못한다
    그래서 혹자는 기가 강하게 표출되기 때문이라 말하지만, 실상 소나무 밑에는 잔디를 비롯한 어떠한 풀도 자
    라지 못하는 법이다
    아무 것도 아닌 현상을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이다
    우측 묘소도 소나무 아래에 있어 역시 잔디가 전혀 자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위 지점을 자세히 볼 것 같으면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우측으로는 가지를 뻗었으나 좌측에는 가지가
    없어 빈약하기 짝이 없다. 이를 좌측 蟬翼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점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며 본인이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기도 하다
    산이 곧게 내려와서 봉우리를 만들면 반드시 양쪽으로 가지를 만들거나 혹은 厚富해야 되는데, 정상적인 용이
    라면 이것은 절대 불변이다.
    그럼에도 이처럼 기형적인 현상이 발생했다는 것은 현무정의 상태가 비정상임을 말하는 것으로, 마치 새의 한
    쪽 날개가 없는 것이나 짐승의 한 다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다보니 당판도 우측은 넓고 좌측은 좁아 당판의 균형이 맞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곳은 病龍이며 偏龍인 것이니 묘소에서는 치명적인 구조적 결함인데, 이 미세한 가지 하나 없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리고는 또다시 묘 앞에서 두 개의 가지 3, 4를 뻗었다





    이것은 또 한 번 기봉하면서 진행했다는 의미인 것이니, 실상 이곳은 완만하고 평탄한 당판을 형성하지 못한
    곳이다

    止處隱伏 無有去意 (머무는 땅은 차분히 엎드려 가고자하는 의사가 없어야 한다)


    5, 청룡, 백호
    來龍에서 파생된 內靑龍 D는 起伏없이 가늘게 이어지니 무력하기 짝이 없다
    그나마도 끝 부분이 밖으로 背去하고 있다
    한편 A에서 시작된 내백호 E는 곧게 진행하다 느닷없이 90도로 방향을 바꾸면서 건원릉 과협처 부근을 衝하
    고 있는데, 매우 불길한 형태가 아닐 수 없다
    즉 청룡은 있으나 마나이고 백호는 건원릉을 겁탈하는 형태이니, 차라리 청룡 백호가 없느니만 못한 꼴이 되
    었다.





    6, 水 
     

    위 안내도에서 보듯이 건원릉의 內水는 길고 곧게 나가고 있다
    풍수에서 물 빠짐은 泄氣로 간주하기 때문에 매우 좋지 않은 형태인데, 아마 숲을 조성하지 않았다면 물 나감
    이 빤히 보였을지도 모른다
    물론 저 멀리 백호에서 파생된 안산이 물의 直去를 막아주고는 있으나 이와 같은 경우는 외청룡의 물 거두어
    줌이 중요한데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
    또 外水인 왕숙천도 동구릉을 외면하듯 비켜가니 무정하기 짝이 없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건원릉은 형세론으로 보아 주산에서부터 용혈사수까지 무엇 하나 이로움이 없다
    상태가 이와 같은데도 무학대사를 거론하면서 임금이기 때문에 최고의 명당을 차지했을 것이라는 선입견과
    화려하게 조성한 겉모습이 더해져 천하 대명당이라 말하고 있다


    [3] 음택의 동기감응론

    풍수에서는 대체로 묘를 쓰고 난 후에 태어난 자식이 묘 바람을 가장 많이 받으며, 나이가 어릴수록 더 큰 영
    향을 받는다고 한다
    실제 그런지 몇몇 묘소들을 조사해 보았다

    표1



    표2 오 빈 묘소




    해주오씨 오 빈 묘소는 안성에 있는데 매우 습한 곳에 있다
    그 묘의 후손들은 손자 이후에 급격히 몰락함을 볼 수 있다.
    문중에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오빈은 4형제인데, 4형제 중 오빈의 후손이 가장 몰락했다고 한다

    위에서 보듯 비록 단편적인 예이지만 대체로 손자 증손 고손까지, 조상 묘소가 좋으면 좋은 데로, 나쁘면 나쁜
    데로 영향을 많이 받는 것을 볼 수 있었다


    [4] 건원릉의 후손들
    이번에는 태조 후손들의 삶을 살펴본다.



    1408년 건원릉을 쓰고 10년 후 느닷없이 태종의 장자인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되고 만다.
    당시 이일은 엄청난 정치적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왕실 불행의 서곡에 불과할 따름이다

    세종의 장자 문종(1414~1452) : 즉위 2년 만에 39세로 서거
    수양대군, 세조(1417~1468) : 계유정란으로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부도덕한 임금이라는 멍에를 평생 짊어지
    게 된다.
    안평대군(1418~1453) : 36세 때 계유정란으로 친형 수양대군에게 賜死
    임영대군(1419~1469) : 51세 卒, 대군들 중 가장 평탄한 삶
    광평대군(1425~1444) : 20세로 요절
    금성대군(1426~1457) : 32세에 역시 친형 수양대군에게 반역죄로 처형됨
    평원대군(1427~1445) : 19세로 요절
    영응대군(1434~1467) : 34세로 卒

    세종은 조선의 임금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왕으로 추앙 받지만 그 자식들은 피를 나눈 형제간에 권력 다툼으
    로 죽고 죽이고 또는 요절하는데,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며 극단적인 상황의 반전이 아닐 수 없다

    문종의 장자 단종(1441~1457) : 17세에 삼촌 수양대군에게 죽음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1438~1457) : 20세에 요절
    세조의 차자 예종(1450~1469) : 20세에 요절
    예종의 장자 인성대군 : 幼年에 요절

    예종의 차자 제안군은 4세의 어린 나이이므로 다음 왕위는 16세인 월산군에게 가야했는데, 그 마저도 동생인
    자을산군(13세)의 차지가 된다
    무슨 끈질긴 악연인지 끝까지 장자를 거부하고 있으니, 조선초기의 왕실은 마치 저주라도 받은 것처럼 극도의
    혼란에 빠지게 된다.


    [5] 英陵의 移葬
    당시 조정에서는 이렇듯 계속되는 불행의 원인을 1450년 서거한 세종임금의 영릉에 문제가 있다고 여긴다.
    그도 그럴 것이 영릉을 선정할 당시 풍수인 최양선은 대모산 아래에 있는 영릉을 보고 맏아들을 잃고 손이 끊
    어지는 형상이라고 극렬하게 반대하지만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설상가상 위에서 열거한 사건
    과 우환의 대부분이 영릉을 쓴 직후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종이 즉위하자마자 부랴부랴 여주로 이장을 하는데, 불길한 예상과 달리 영릉의 상태는 매우 양호하
    였다.

    예종1년( 1469 ) 2월 30일
    영릉(英陵)을 파서 여니, 현궁(玄宮)은 물기가 없고, 재궁(梓宮)과 복어(服御)가 새 것과 같았다.

    <잠깐>
    시중에 나와 있는 몇몇 풍수책에서 영릉의 이장 당시 물이 가득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더군다나 다른 책들도 또 아무 확인 없이 무조건 베끼다보니 일반인들은 으레 그런 줄 아는데, 반드시 시정되
    어야 할 것이다

    예종1년(1469) 11월 28일
    辰時에 임금이 자미당에서 훙하다

    세종의 영릉을 1469년 2월 여주로 移葬 後


    그러나 영릉을 이장한 10개월 후에는 예종마저 20세에 급서하며, 뒤를 이은 성종 임금은 중전이었던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리는 비정한 남편이 되고 자신도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는다
    또 성종의 장자 연산군은 광적인 폭정 끝에 폐위되어 31세로 생을 마감하며, 중종의 맏아들 인종은 31세,
    그리고 인종의 이복동생 명종은 34세, 그리고 명종의 장남 순회세자는 13세로 유명을 달리한다
    이로써 160년 간 근근이 이어지던 적통의 승계는 끝이 난다
    따라서 왕실의 우환은 이장 전이나 후에도 마찬가지이므로 영릉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실제로 구 영릉지로 추정되는 현재의 인릉을 살펴보면 용세나 사격 등에서 왕실의 불행과 관련하여 어떠한
    단서도 찾을 수 없으며, 오히려 태종의 헌릉보다 나은 곳이다




    [6] 태종의 헌릉
    그렇다면 이번에는 태종의 헌릉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태종이 이곳에 묻힌 지 30년 뒤부터 혼란이 시작되므로 헌릉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그림에서 보듯이 구영릉지 즉 현재의 인릉에서는 헌릉의 능선이 청룡이 된다
    그러나 이곳 헌릉에서의 청룡은 건원릉에서와 마찬가지로 거의 90도에 가깝게 도망가는 형태가 되었으니,
    왕실의 불행에 헌릉의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당시 헌릉의 소점도 건원릉과 마찬가지로 하륜이 정했다고 하는데, 그 부분을 간과한 것인지 아니면 무시
    한것인지 하 륜의 풍수관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아무튼 얽히고설켜 고차원의 방정식을 푸는 것처럼 대단히 복잡하게 되었는데, 묘 하나를 보고 한 집안의
    길흉을 점친다는 것이 얼마나 난해하고 무모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세 곳을 비교했을 때 본인의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건원릉이 모든 면에서 좋지 못하고, 헌릉은 청룡과 수세
    가 특히 좋지 못하며, 의외로 구 영릉은 모든 면에서 무난하였다



    이상을 토대로 마무리를 해 보겠다 


    [7] 맺음말

    당나라 때 복응천이 지은 설심부에서는 청룡은 대체로 長子를 주관한다고 한다
    풍수의 화복설이 반드시 항상 늘 꼭 그런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지만, 한두 번도 아
    니고연속되는 夭折과 불행은 우연이라 보기에는 심상치가 않은 것이다

    雪心賦 : 東宮竄過西宮 長房敗絶, 右臂尖射左臂 小子貧窮
    (청룡이 달아나고 백호만 있으면 장자가 패절하고, 백호가 뾰족하게 달아나고 청룡만 있으 면 작은 아들이
      빈궁하다)

    그런데 우리는 위에서 건원릉의 좌측가지 없음과 청룡의 무력함을 볼 수 있었다
    특히 현무정의 좌측가지 없음은 내 몸체로서 묘소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매우 심각하고 치명적인 결함인
    데,이것은 客山인 청룡의 허약함에 비할 바가 아니다
    본인은 그 부분을 왕실에서 長子의 불행과 관련성을 주목하는 것이다
    ..... 

    그리고 내백호의 예상치 못한 돌변은 마치 크고 힘 있는 신하가 작고 힘없는 주군을 불시에 옆구리를 치는
    형상이 아닐 수 없다
    이곳에서 계유정란의 하극상이 연상된다면 지나치다 할 것인가?

    물론 다분히 귀납적인 추론이 되었지만, 건원릉의 형태에서 조선 초기의 혼란스런 상황을 매우 근사하게
    유추할 수 있었다
    따라서 본 풍수인은 단종 때까지 50년간 혼란의 원인은 상당부분 건원릉에서 비롯된 것이며, 거기에 헌릉
    의 청룡까지 더해져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이라 보는 것이다
    즉 건원릉의 지세는 묘를 쓰기에 매우 불길하고 불리한 곳이다

    그런데도 처음부터 건원릉은 틀림없는 명당이라는 전제를 갖고 시작하면서, 발복은 고사하고 흉사만 계속
    되니까 풍수를 부정하고 불신하게 되는 것이다
    건원릉에 대한 잘못된 믿음 때문에 풍수 전체가 미신이라 매도당하고 있음이다

    한편 건원릉은 조선 왕릉의 모델이고 표본이 되다보니 거의 모든 왕릉이 득보다 실이 많은 땅을 선정하는
    愚를 범하게 된다



    500년간 계속되는 조선 왕실의 혼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굴욕, 그리고 망국의 치욕까지 첫 단추를 잘
    못 낀건원릉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풍수인들은 건원릉을 반면교사로 삼아 더 이상의 실패와 실수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부단히
    경계하고 노력해야 하겠다

     

     

    조선왕조 계보(1392~1910, 518년간, 총 27대)

     

    (왕의 이름을 클릭하시면 왕의후손과 업적등 모든 내용을 볼수 있음)

     

    제1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제25대

    제26대

    제27대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인종

    명종

    선조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경종

    영조

    정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

    순종


     

    조선시대 왕의 계보를 간단한 사실과 함께 정리해 볼게요.

     

    태조 이성계의 건국

    실권없는 왕 정종

    왕자의 난의 최후 승자 이방원  태종

    문화의 꽃을 피운 충녕대군 세종   

    30년의 세자 생활과 8년의 섭정, 짧은 치세  문종

    비운의 왕자 홍위 단종

    조카를 폐위시킨 수양대군 세조

    1년 2개월의 치세, 20세 요절 예종

    → 유교정치의 기반을 확립한 성종

    → 사화의 시대 연산군 중종 인종 명종

    훈구파의 몰락,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고 임진왜란, 선조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북인은 대북과 소북으로)

    대북의 지지를 받은 광해군명과 후금 사이 중립외교

    서인에 의한 인조 반정 (대북 소멸 후 제 1당은 서인, 제 2당은 남인), 병자호란

    형인 소현세자 사후 왕이 된 봉림대군 효종북벌 추진

    예송논쟁으로 벌어진  서인과 남인의 치열한 정쟁, 현종

    → 서인과 남인사이에서 엎치락 뒤치락 환국 정치를 편 숙종 (남인 탄압에 대한 입장 차이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소론의 지지를 받았으나 4년 2개월의 짧은 치세를 한 장희빈의 아들 경종

    → 노론의 지지를 얻고 왕이 된 영조

    → 파당을 배격하고 새로운 인물로 친위세력을 형성한 정조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 일파에 의한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시작

    후사를 남기지 않은 헌종

    사도세자의 증손자이자 정조의 이복 동생의 손자인 강화도령 철종

    효종의 동생 인평대군의 6대손 남연군의 아들인 흥선대원군과 그 아들 고종

     

    [조선왕조 계보]

    즉위년도

    재위기간

    주요 일지

    1

    태조(太祖)

    1392

    6

    - 고려말 무신으로 왜구를 물리쳐 공을 세우고,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멸망
    - 1392년 조선왕조를 세움. 

    2

    정종(定宗)

    1398

     2

    - 사병을 삼군부에 편입시킴.

    3

    태종(太宗)

    1400

    18

    - 태조가 조선을 세우는데 공헌
    - 여러 가지 정책으로 조선왕조의 기틀을 세움

    4

    세종(世宗)

    1418

    32

    - 집현전을 두어 학문을 장려
    - 훈민정음 창제
    - 측우기, 해시계 등의 과학기구를 창제
    - 북쪽에 사군과 육진, 남쪽에 삼포를 둠

    5

    문종(文宗)

    1450

    2

    - 유교적 이상 정치
    - 문화를 발달시킴

    6

    단종(端宗)

    1452

    3

    -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계유사화로
      수양대군에 의해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함

    7

    세조(世祖)

    1455

    13

    - 단종을 좇아내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
    - 국조보감(國朝寶鑑), 경국대전(經國大典) 등
      을 편찬
    - 관제 개혁

    8

    예종(睿宗)

    1468

    1

    - 경국대전을 완성 시킴 

    9

    성종(成宗)

    1469

    25

    - 숭유억불, 인재등용 등 조선초기의 문물
      제도를 완성
    - 경국대전을 편찬함

    10

    연산군(燕山君)

    1494

    12

    - 폭군으로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를 죽임.
    - 중종반정으로 폐위됨. 

    11

    중종(中宗)

    1506

    38

    - 혁신정치를 기도하였으나 훈구파의 원한으로
      실패
    - 1519년 기묘사화, 신사사화를 초래함

    12

    인종(仁宗)

    1544

    1

    - 기묘사화로 없어진 현량과를 부활함. 

    13

    명종(明宗)

    1545

    22

    - 12세에 즉위하여 을사사화, 정미사화,
      을유사화, 을묘왜변을 겪음

    14

    선조(宣祖)

    1567

    41

    - 16세에 즉위
    - 이이, 이황 등의 인재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썼으나 당쟁과 임진왜란으로 시련을 겪음

    15

    광해군(光海君)

    1608

    15

    - 당쟁으로 임해군, 영창대군을 역모로 죽이고
      (계축사화),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등 패륜
      저지름
    - 서적편찬
    - 명나라와 후금에 대한 양면 정책으로 난국에
      대처함
    - 인조반정으로 폐위됨

    16

    인조(仁祖)

     1623

    26

    - 이괄의 난, 병자호란, 정묘호란을 겪음

    17

    효종(孝宗)

    1649

    10

    - 병자호란으로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
      에 볼모로 8년간 잡혀 갔다 돌아와 즉위 후
      이를 설욕하고자 국력을 양성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18

    현종(顯宗)

    1659

    15

    - 즉위 초부터 남인과 서인의 당쟁에 의해 많은
      유신들이 희생됨
    - 대동법을 전라도에 실시
    - 동철제 활자 10만여 글자를 주조함

    19

    숙종(肅宗)

    1674

    46

    - 남인, 서인의 당파싸움(기사사화)
    - 장희빈으로 인한 내환
    - 대동법 전국 확대
    -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국경을 확정

    20

    경종(景宗)

    1720

    4

    - 숙종의 아들로 장희빈 소생.
    - 신임사화 등 당쟁이 절정에 이름. 

    21

    영조(英祖)

    1724

    52

    - 탕평책을 써서 당쟁을 제거에 힘씀
    - 균역법 시행, 신무고 부활, 동국문헌비고
      발간 등 부흥의 기틀을 만듦
    - 사도세자의 비극 겪음

    22

    정조(正祖)

    1776

    24

    - 탕평책에 의거하여 인재를 등용
    - 서적보관 및 간행을 위한 규장각 설치
    - 임진자, 정유자 등의 새 활자를 만듦
    - 실학을 발전시킴
    - 문화적 황금시대 

    23

    순조(純祖)

    1800

    34

    - 김조순(金組淳) 등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시대
    - 신유사옥을 비롯한 세 차레의 천주교 대탄압
      이 있었음
    - 1811년 홍경래의 난 발생

    24

    헌종(憲宗)

    1834

    15

    - 왕5년에 천주교를 탄압하는 기해사옥 발생

    25

    철종(哲宗)

    1849

    14

    - 헌종이 후사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황후의
      명으로 즉위함
    - 왕2년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맞아
      들여 안동 김씨세도정치가 시작됨.
    - 진주민란 등 민란이 빈번

    26

    고종(高宗)

    1863

    44

    -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 대원군과 민비의 세력다툼
    - 구미열강의 문호개방 압력에 시달림
    -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퇴위함
    - 임오군란이 일어남

    27

    순종(純宗)

    1907

    3

    - 고종의 둘째 아들
    -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35년간 치욕의
      일제시대를 보내게 됨


    (자료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사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