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산(踏山)/仁 山 風 水 踏 山 記

서희장군 묘

仁山 -세발낙지 2010. 11. 3. 13:26

 

 

서희장군

본관은 이천. 자는 廉允(염윤).

아버지는 內議令(내의령)을 지낸 弼(필)이다.
할아버지 神逸(신일)때까지는 이천 지방의 토착 호족이었다가

아버지에 이어 재상에 오르면서 중앙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했고,

뒤이어 그의 아들 訥(눌)과 惟傑(유걸)이

각각 門下侍中(문하시중)과 左僕射(좌복야)를 지냈을 뿐 아니라

訥(눌)의 딸이 현종의 비가 됨으로써 고려 사회의 주요 문벌귀족세력이 되었다.
960년(광종11)과거에 갑과로 급제한 뒤 광평원외랑을 거쳐 내의시랑이 되었다.
972년에는 10여 년 동안 외교적으로 단절되어 있던

송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검교 병부상서의 벼슬을 받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

左丞(좌승)을 거쳐 983년(성종2)에는 병관어사가 되었고, 얼마 뒤 내사시랑이 되었다.

 

 

서희장군

 

소손녕과 서희의 담판

 

서희가 소손녕의요청에 의해 자기 진영에 도착하자

소손녕은 뜰에서 절을 하라고 말하였다

이에 서희는“ 뜰에서 절하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대할 때만 있는 일일 뿐

양국의 대신 끼리 대면 하는 좌석에선 그런일은 있을수 없다”고 하면서 거절 했다

소손녕은 끈질기게 요구 하였지만 서희는 끝내 거절하였고

마침내 두사람은 대등한 단상에서 대화하게 되었다.

서희와 마주 앉은 소손녕은 두가지를 요구 하였다

첫째는 고구려의 옛땅은 거란에 속한 것이니 내놓으라는 것이고

둘째는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요나라를 섬기지 않고

송나라를 섬기는 이유을 해명하라는것 이었다.

이에 서희는 국호를 이미 고구려를 계승하고 있으며

고구려의 옛땅이 거란의 영토임을 반격하였다

오히려 거란의 요양을 고려에 복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거란과 외교가 성립되지 않은 것은

고려와 거란사이에 여진이 있어서 왕래하기가

바다를 건너는 것 보다 어려운 탓이라고 해명하였다.

그래서 통교를 방해하는 여진을 쳐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소손녕은 서희말을 반박하지 못하고 받아 드림으로써

고려와 거란의 전쟁은 종결되었다고 한다

 

  

2010.06.17.상황-역사문화관광 해설사 홍민자 객원기자 컬럼에서...

묘상태로 봐서 좌청룡쪽이 약간 허한 모습이 보여

바람에 의한 풍화작용으로 묘가 심하게 훼손되지 않았다 보여진다

 

 

 

 

 

 

 

 

 사초를 해서 깨끗하게 정리된 묘역전경

 

 

 

 서희장군 묘역에서 본 유정한 안산

 

 

 

 

 

 

 

 

 

 起龍穴과 自起案

左旋水

乙坐申向

 

 

 

 

 

 

 

 

서희장군 父 서필묘역이다.

서필묘역은 서희장군묘역 기룡혈 끝자락에 모셔져 있다

어떻게 보면 역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멀리 떨어져 있어서 역장이라고 하는것은 안맞는 이야기다.

 

 

 

 

 辰坐戌向

 

 

 오히려 서희장군묘역보다 잘 정비된 모습을 볼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