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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金詩羅(본명 김천동)품바문화 이대로 둘것인가?

仁山 -세발낙지 2010. 7. 12. 23:12

 

 

▲ 80년대 민중 정기 회복 선구자 였던 故 김시라 선생  
서삼석 군수는 "지난 12일 '2008년 주요시책보고회' 에서「지역의 문화적 가치를 더욱 높여나가는 일」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라"고 지시한바 있다.
 
필자는 "무안이 낳은 위대한 문화 유산「각설이타령 및 故 김시라 선생」의 문화적 보존 가치가 방치되고 있는 것"에 안타까움을 넘어 서글픈 마음으로「각설이타령」을 재조명한다. 
 
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절씨구씨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일자나 한 장 들고나 보니 일선 가신 우리 낭군 죽으면 죽었지 못 잊것네…
, 김시라의 '각설이타령' 가락이 지금도 뇌리를 스치며 애환을 빡빡 긁어 헤치며 가슴을 파헤치는 것 같다.

품바 각설이타령이 한국 연극계에서 사회 풍자극으로 4,300회라는 장기간 공연으로 유명세를 탄 배경에는 무안군 천사마을이 있었고, 그 가운데『김시라』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천사마을 주인공은「김작은」으로서 한국 거지계의 대부인「김춘삼」과 필적되는 조선 거지계 양두 거물로서 일제강점기 시절 1920년 부두노동자 파업 주동자로 지목되어 일제경찰의 수배를 피하기 위해 장타령꾼으로 변신 몸을 보존하다가 무안군 일로읍에 정착하여 같은 처지의 100여명을 규합 천사마을을 세우고 구전되어온 각설이타령을 '민족사관 문화' 로 전승 시켰으며, 그 뒤를 '김시라' 가 이으며 지금의 민족민중문화로 발전했다.

각설이타령은 멀리는 백제시대부터 전해져왔으며, 기층민중들이 포악무도한 세상에 던지는 詠歎(영탄)·야유·풍자·해학·허무 등을 해학적 풍자와 종교적 승화로 꾸며낸 민족사관적 장르로 꾸며 웃음을 자아내고 삶의 처절한 비애감을 맛보게 하는 점이 특징이다.

구전으로만 전해 오던 각설이타령은 신재효 선생(1812~1884)의「변강쇠가」에 의해 문자로 정착한 후 조선조 말 민족문학으로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자유당시절까지 맥을 이었으나, 1968년 공화당 정권시절 걸인 행각 금지법이 시행되면서 사실상 명맥이 끊어졌다.

이후 각설이 타령(일명 품바타령)은 1980년대 암울했던 국민 정서를 민족사관문학으로 파고들며 인권탄압 독재정권에 대해 저항의식을 고취 시키며 민주화 과정에 탄압정권을 향해 통렬한 비판 문화를 제시하며 새로운 전환기를 맞는다.

▲ 故  김시라 선생 
품바 문화를 말하기 위해서는 억압받던 독재권력 시대에 '민족사관' 정기를 뿌리 깊이 내리게 한 무안군이 낳은 '故 김시라 선생' 을 빼 놓고 말할 수 없다
.

극작가 '故 김시라 선생' 은 품바라는 연극을 통해 그 옛날 각설패들이 부르던 각설이 타령을 연극으로 재구성하여 사회를 통렬히 비판했다.

품바가 연극으로 재구성되어 민중의 가슴속을 파고들게 된 사회적 배경은 5·18광주민주화운동 직후 호남인과 민주화 동지들의 가슴에 맺힌 한의 분출구를 열었다는데서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80년대 권력층을 향해 피를 토하듯 비판했던【권력이 있는 곳에는 정의가 없는 법이라는디 말이여, 이놈의 시상이 어찌 될라고 말이여, 탱크를 몰고 들어와, 제나라 백성들을 개 잡대끼 잡는가 몰러….】라고 외치며 당시 시대 상황을 비판한 사설을 들 수 있다.

특히 각설이타령 속에는 민족혼이 숨쉬는 장르가 펼쳐지는데 그 특별한 예로서 일제강점기 國恥(국치)의 서러움 속에 국가찬탈범 일본 및 친일분자들에게 던지는 애국애족의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항일운동을 묘사한 대목으로【나까무라상, 나까무라상, 밖에는 바람이 징하게도 춥수무니다. 그래야 한다, 그래야 한다, 그래야 꽃들이노 못핀다. 나까무라상, 허지만 설한풍에도 꺾이지 않고 피어나는 설매화나 동백꽃은 어찌 하겠스무니까? 그것들이노 못피게 해야한다, 그것들이노 반역자다./ 데라우찌 각하, 전장군이노 조센징이노 잡아왓스무니다….】등의 사설에서 강력한 민족성을 통해 독립정신을 불태우는 의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또한【나리나리 개나리, 오늘 아침 얻은 한푼, 나리한테 바치구요, 오늘 저녁에 얻은 쉰 밥, 나리집 개한테 바칠라요….】라는 사설을 통해 보수주의 타파를 부르짖고 있다.

또한 아낙네들의 숟가락 인심을 집단생활의 人倫(인륜)으로 삼았던 각설이패의 준법정신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아녀자 겁탈 심판에서【각 분소의 대빡들을 다 모이라고 해라…. 아녀자를 겁탈한 놈에 대한 우리의 계율은 무엇인가?… 생매장.】이라며 생매장 해버린다. "아녀자들의 밥주걱은 그들의 생명 줄과 같다"는 철학이 베어 있으며, "겁탈은 곧 생명 줄을 끓는 범죄행위인 것"이다.

각설이타령은 무너져 가는 사회의 위계질서에 대해서도【삥아리 잡는 대 도끼가 대빵, 고래 잡는데 바늘이 대빵, 뛰는 놈 위에는 뛰는 놈을 보네고, 어~허 품바 잘이 헌다. 범 없는 산중에 여시가 대빵, 고래 없는 바다에 갈치가 대빵, 뛰는 놈 위에는 나는 놈을 보네라. 어~허 품바 잘도 헌다】라고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각설이의 어원은 覺說理(각설리)로서「자연의 이치를 깨우쳐 말로서 전한다」는 뜻이다.

무안군이 배출하고 세계화 시킨『각설이타령』이라는 "위대한 문화유산을  보존 계승시키는 참된 가치도 깨우쳐야 할 것"이다.

인근 자치단체에서는 엄청난 돈을 쏟아 부으며 공연예술장 건립에 발걸음을 재촉하며 사람 끌어들이기에 야단법석이다.

무안군은 문화예술공연장을 보유하고도 무안에서 탄생한 민족사관 문화 『각설이타령』이 장기간 최대횟수 공연으로 한국기네스북에 등재되고 세계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설공연 프로그램 하나 없는 실정이다.

초의선사 탄생문화에는 수백억씩 쏟아 부으며, 김시라 탄생지가 무안이고『각설이타령』발생지가 무안인데 이러한 위대한 문화 보존 계승에는 왜 그리 인심이 박한지 묻고 싶다.

필자는 외국의 예를 들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유럽을 한번 되돌려보자.
음악가 탄생지가 어떻게 변천되어 왔는지 말이다. 

속담에「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있다. 이러한 어리석은 우를 범하지 말자.

타령은 이렇게 외치고 있다.「너나 나나 불쌍한 존재임엔 마찬가지여, 흉보는 것처럼 뒤찔리는 일도 드물고, 미워하는 것처럼 고통스런 것도 없는 법잉게, 흉보든지 미워하든지, 니 맘대로 혀」라고 말이다.


*金詩羅(김시라)! 그는 누구인가?
 
전라남도 무안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김천동(童)이다.
한영신학대학을 졸업하고 건국대학교 행정대학원, 고려대학교 노동대학원에서 수학하였다.

1966년 시 《오 자네 왔는가》를 발표하였고, 1975년부터 1980년까지 고향 무안에서 농사를 짓고 방앗간을 운영하면서 시를 쓰는 한편, 1976년에는 인의예술회를 창립해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참혹성을 보고 충격을 받아 이때부터 연극에 뛰어들어 각설이타령을 기초로 한 민중 1인극 《품바》를 만들어 이듬해 일로읍(邑) 공회당에서 지역민들을 상대로 공연하였다.

1983년 무대를 서울로 옮긴 뒤에도 《품바》를 계속 공연하면서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으로 민중의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한때 공연 내용을 문제삼은 당국에 의해 해외공연이 금지되기도 하였지만, 1998년까지 총 4,000회의 공연을 가질 정도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극단 가가 창단 대표, 소극장 왕과시 대표, 가가마당 강강술래극장 대표, 국민시 생활운동 벽시 동인회 및 상황문학회 창립 회장을 지냈고, 한민족방언시학회와 한민족 방언연극제 조직위원회를 창립 발족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