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 (金時習) ..조선의 3대 천재, 그러나 영원한 方外人
김시습 (金時習 .. 1435~1493) ... 본관은 강릉(江陵), 字는 열경(悅卿), 號는 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峰), 청한자(淸寒子), 벽산(碧山)이며, 法號는 설잠(雪岑), 諡號는 청간(淸簡)으로 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신라 태종무열왕의 6세손인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으로, 무관이던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김일성(金日省)의 아들이다.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났다.
김시습의 초상화 .. 보물 제1467호
김시습(金時習)은 유(儒), 불(佛), 선(仙)이라는 동양의 3대 정신을 아우르는 사상가이자, 타고난 천재성과 뛰어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한 奇人이었다. 현실에서는 이룰 길이 없는 포부와 역량을 한탄하며 " 時代의 孤兒 "로 일생을 마쳤지만, 그가 꿈 꾼 이상세계를 작품을 통하여 승화시킨 고귀한 예술혼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비판과 야유를 넘어 일종의 虛無意識을 드러내기도 하였지만, 이미 이루어진 현실을 또 다른 목적으로 무너뜨리고도 하지 않았다. 不義를 인정하거나 그 것에 동참하지는 않았지만 타도하려고도 하지 않은 중용(中庸)의 자세를 견지한 셈이다.
김시습의 자화상. 自畵像
김시습은 생전에 2편의 자화상을 남겼다. 그는 위의 자화상을 그린 후 거기에 찬(贊)을 붙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하(李賀)를 내리깔아 볼 만큼
海東에서 최고라고들 말하지
격에 벗어난 이름과 부질없는 명예
네게 어이 해당하랴 ?
네 형용은 아주 적고
네 말은 너무도 지각없구나
마땅히 너를 두어야 하리
골짜기 속에...(宜爾置之丘壑之中)
" 골짜기 속에 둔다 .. 구학지중(丘壑之中) "는 말은 아무렇게나 시신이 나딩굴게 내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본래 일구일학(一丘一壑)이라 하면 은둔자의 거처를 말하지만, 김시습은 "구학(丘壑)"이란 말을 더욱 자조적인 의미로 사용하였다.
그는 일생을 남에게 관대하였지만, 자기 자신에 대하여는 지나치게 엄격하여 때로는 自虐的이기까지 하였다. 그의 자화상은 미감을 찡그리고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어떤 초상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인상이다. 정신의 긴장은 그의 몸을 지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김시습이 말년에 머물렀던 부여 無量寺에는 그의 초상화를 모신 閣이 있다. 그는 59세에 이 곳 무량사에서 죽는다.그리고 아래의 사진은 그의 부도(浮屠) 즉 墓이다. 무량사 입구에 있다.
출생 그리고 천재 소년
김시습은 1435년 (세종 17)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야사에서는 김시습이 태어나기 전날 밤, 근처에 있던 성균관 유생들이 그의 집에서 공자(孔子)가 태어나는 꿈을 꾸었는데, 정말로 다음 날 김시습이 태어나자 장차 귀한 인물이 될 징조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이웃에 살던 이조참판을 지낸 최치운(崔致雲)이 논어에서 인용한 " 배우면 곧 익힌다 "는 뜻으로 시습(時習)으로 짓기를 권유하여 그대로 따른 것이다.
그는 태어난지 8달 만에 글자를 알았고, 세살 때에는 이미 詩를 지었다.즉, 맷돌에 보리를 가는 것을 보고 "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는 어디서 나는가? 누런 구름이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 "라는 詩를 읊었다고 한다. 배우지않아도 스스로 깨닫는..말 그대로 천재이었다. 5살 때 홍문관 수찬(修贊)으로 있던 이계전(李季甸)의 門下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공부에 전념하면서 그의 천재성이 장안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좌의정 허조(許稠)가 김시습의 소문을 듣고 호기심으로 그의 집을 찾았다. 김시습을 만난 허조(許稠)는 그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 네가 아주 글을 잘 짓는다 하던데, 이 늙은이를 위하여 늙을 노(老)자를 넣어서 詩 한구절을 지어 줄 수 있는가? "라고 하였고, 이 말을 들은 김시습은 조금도 주저하는 바 없이 즉석에서 이렇게 詩를 지었다.
" 노목개화심불(老木開花心不老) ... 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마음만은 늙지 않았도다 "란 詩이었다.
이러한 소문은 드디어 대궐 안에까지 알려졌고, 이를 들은 世宗은 박이창(朴以昌)에게 시켜 사실 여부를 확인해보라고 지시하였다. 朴以昌은 대궐로 불려 온 金時習의 능력을 여러 방면으로 시험해 보았으나, 어린 나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이 모든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하였다. 박이창은 이러한 사실을 世宗에게 그대로 보고하였다.
보고를 받은 세종은 김시습의 재주를 가상히 여겨 비단 50필을 賞으로 주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면서 김시습이 그 많은 비단을 어떻게 가져가는지 보기 위하여, 다른 사람이 도움을 받지 말고 혼자 가져가야 한다고 분부하였다. 이에 어린 김시습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각 필의 끝을 서로 묶은 다음 그 한쪽 끝을 허리에 묶어서 끌고 나갔다고 한다. 이 광경을 목격한 세종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감탄하였고, 世宗은 김시습이 성장하면 重하게 등용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계전(李季甸)의 문하에서 학문의 기초를 익힌 김시습은 이어서 당시의 석학인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김반(金泮)과 윤상(尹祥) 등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를 계속하여, 겨우 10여세에 익히지 못할 책이 없을 정도이었다. 이러한 그에게 서서히 불행이 닥쳐오기 시작하였다.
김시습이 15세가 되던 해, 어머니 장씨(張氏)가 죽게 되어 김시습은 外家에서 지내게 되었으나, 3년이 못 되어 의지하던 외할머니마저 별세하여 다시 본가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중병을 앓고 있었다. 이 와중에 그는 훈련원 도정(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아 결혼하였지만, 학문에 심취한 김시습은 가정에 흥미를 잃었으며, 이때 또한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그는 과거를 준비할 겸해서 삼각산 중흥사(中興寺)로 들어갔다. 그가 21세가 되던 해에 중흥사에서 엄청난 소식을 듣게 된다.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었다.그는 통분을 금치 못하고 꼬박 사흘동안 망연자실하여 방 안에만 틀어 박혀있던 김시습은 공부하던 책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는 머리카락마저 잘라버리고 山을 내려와 세상을 방황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나이 21살이었다.
분노와 회한의 방랑생활
아무런 계획없이 방랑 길에 나선 김시습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워낙 명성이 높았던지라 어디를 가도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가슴 한 구석에 맺힌 젊은 지식인의 회한은 지울 수가 없었다. 관서지방으로 방향을 정한 김시습은 이러한 자신의 울적한 심정을 詩로 지으면서 각지를 유랑학 ㅣ시작하였다.
3년여에 걸쳐 관서지방의 곳곳을 돌아 본 김시습은 1458년(세조 4)에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을 쓰고 나서 관동지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26살에 관동지방의 유랑을 마치고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을 정리한 후, 이번에는 호남지방으로 다시 정처없는 나그네 길을 떠났다.
29살이 되던 해에 三南지방의 유랑을 끝낸 후 이번에도 역시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을 지었는데, 문득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니 어느덧 가슴 속의 회한은 희미해져 있었다. 오랜 기간의 객지생활로 몸은 쇄약해졌지만, 심기일전하는 마음으로 새로이 공부하고 싶은 심정이 간절하였다. 그리하여 1463년 (세조 9)에 책을 구하기 위하여 다시 한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전부터 자신을 아껴 주었던 효령대군(孝寧大君)을 만나게 되었다.
김시습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효령대군은 조카인 世祖에게 그를 적극 추천하였다. 그리하여 김시습은 世祖의 불경(佛經) 번역 작업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조정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계유정난(癸酉靖亂) 때의 功臣들이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보고 세상사가 다시 역겨워진 김시습은 慶州에 있는 금오산(金烏山)으로 들어가 칩거하고 만다.
그 후 2년이 지난 1465년 (세조 11) 3월에 원각사(圓覺寺)의 낙성식에 참석해 달라는 효령대군의 요청을 받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찬시(讚詩)까지 지어 주지만, 효령대군과 世祖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다시 금오산으로 돌아가 버린다.
그 곳에서 김시습은 속세와 완전히 단절하고 6년 동안 머무르면서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神話)와 산거백영(山居百詠)을 비롯한 여러 작품을 썼다. 이러면서 세월도 흘러 세조와 예종(睿宗)이 연이어 죽고 어느덧 성종(成宗)이 왕위에 올랐다.
1471년 김시습이 37살이 되던 해에, 또 다시 효령대군의 요청으로 서울로 돌아왔으나, 20여년을 세상과 겉돌았던 그로서는 서울생활에 잘 적응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이듬해 서울 성동에 집을 짓고
이름없는 민초로서 농사를 지으며 살기로 하였다. 이 때 김시습의 나이는 벌써 40세에 들어서고 있었으나,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天才의 가슴은 세상에 대한 분노와 역겨움만이 가득하였다.
이러한 그의 심정은 현실에 대한 야유로 나타나 당시의 고관대작들이 그에게 망신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영의정 정창손(鄭昌孫)과 달성군 서거정(徐居正) 등이 김시습에게 공개적으로 질타와 망신을 당하여지만 그들도 그리 노여워하지 않았다. 그들도 김시습의 天才의 恨을 이해하였고, 망나니같이 구는 그를 상대해보았자 자신들의 체면만 훼손될 뿐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시습은 젊었을 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신숙주도 증오하였다. 世祖를 도왔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한강을 지나다가 강변 압구정(鴨鷗亭)에 걸려있는 한명회(韓明澮)의 詩를 발견하였다. " 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 ... 젊어서는 사직을 짊어지고, 늙어서는 강호에 눕는다 "라는 詩이었다. 이를 본 김시습은 실소를 금치 못하고 분통을 터트린다. 그리고 두 글자를 고쳐 놓았다. " 靑春亡社稷, 白首汚江湖 .. 젊어서는 나라를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 "...
김시습이 바라본 세상은 온통 비뚤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일 수 없어 奇異한 행동을 일삼았다. 그 시절 김시습은 책을 읽다가도 의분을 참을 수 없어 통곡하기도 하고, 詩를 지어서는 마구 찢어서 던져 버리는 등 바른 정신으로는 도저히 견디지 못하여 魂이 나간듯 살아가는것이 당시 그의 모습이었다. 김시습은 이렇게 세상과 완전히 고립된 채 불안정한 심신으로 10여년을 보냈다.
끝없는 방황
자신을 학대하고 세상을 야유하며 마치 불자(佛者)처럼 살아가던 김시습은 47세 되던 해인 1481년 (성종 12)에 홀연히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기 시작하였다. 예상치 못한 그의 또 한 번의 變身은 奇人같은 일생을 단면적으로 보여준다. 어쩌면 인생의 후반에 접어들면서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초조감이 그를 세상으로 다시 나오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김시습은 먼저 조상에게 그동안 세상을 떠돌면서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罪에 대하여 용서를 빌고는 안씨(安氏)부인을 맞아 가정을 꾸몄다. 그러나 모처럼의 가정생활도 얼마 후 安氏가 세상을 떠나버려 끝나고 만다. 그런 와중에 1482년 폐비윤씨(廢妃尹氏)에게 사약이 내려지는것을 본 김시습은 또 다시 세상 만사가 허무하고 혐오스러워져 다시 방랑길에 나선다.
이번에는 특별히 친분을 주고 받던 유자한(柳子漢)이 府使로 있는 강원도 양양으로 길을 잡고 떠났다. 그러나 원래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던 김시습은 얼마 안되어 다시 길을 떠나 關東의 각 지방을 발길 닿은대로 떠돌아 다녔다.
사청사우우환청 乍晴乍雨雨還晴 잠시 개었다 비 내리고, 내리다 다시 개니
천도유연황세정 天道猶然況世情 하늘의 이치가 이럴진데 세상 인심이야 어떠랴
예아편시환훼아 譽我便是還毁我 나를 높이다가 곧 도리어 나를 헐뜯고
도명각자위구명 逃名却自爲求名 명리를 피하다가 돌이켜 스스로 공명을 구한다
화개화사춘화관 花開花謝春花管 꽃 피고 지는 것을 어찌 상관하겠는가
운거운구산부쟁 雲去雲求山不爭 구름이 오고 구름이 가도 산은 다투지 않는 법
기어세인수기인 寄語世人須記認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노니 꼭 새겨 두기를
취환무처득평생 取歡無處得平生 기쁨을 취한들 평생 즐거움을 누릴 곳은 없다는 것을..
김시습 ... 無量寺에서 죽다
이렇게 평생을 바람처럼 떠돌아 다니던 김시습이었지만 일정 기간 머무는 곳에서는 반드시 밭을 개간하는 등 손수 일을 하며 지냈다. 勞動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 그는 자신에게 배우러 오는 제자들도 반드시 밭일을 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추악하고 가증스럽기만 한 현실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판적이었던 김시습은 표리부동한 세상의 人心을 비웃으며 살았다. 어려서부터 天才 소리를 들으며 자란 총명함과 학문에의 열정을 모두 묻어 버린채, 영원한 이방인(異邦人)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삶의 회한은 엷어갔지만 가슴 속까지 서려오는 외로움만은 견딜 길이 없었던 김시습은 지친 몸을 이끌고 충청도 부여에 있는 무량사(無量寺)라는 한적한 절로 찾아 들었다.그는 젊었을 때부터 머리를 깎고 중처럼 살았지만 佛敎에 완전히 歸依한 것은 아니었다. 폭력적이고 부도덕한 世祖 등에게 저항하는 뜻으로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佛家의 정신을 통하여 젊은 날의 虛無를 달랠 수 있었던 그는 마지막 길을 부처에게 의탁하고 싶었던지 병든 몸을 이끌고 한적한 무량사를 찾아 갔던 것이었다. 그 곳에서 김시습은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1493년(성종 24)에 59세를 一期로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말년을 또 다시 방랑생활로 보낸 끝에 낯선 사람들 품 속에서 최후를 맞이한 것이었다.
김시습은 죽기 전에 火葬을 하지 말라는 遺言을 남겼는데, 그의 棺을 절 근처에 안치하였다가 3년 후에 장사를 지내려고 棺을 열어 보니 屍身이 썩지 않고 그대로였으며, 얼굴도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평온해 보였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본 승려들은 그가 부처가 되었다고 생각하여 시체를 화장하고 사리(舍利)를 보관하는 돌탑을 세워 그의 뼈를 거두었다.
김시습의 舍利와 舍利函 ... 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
금오신화 金鰲神話
금오신화는 김시습이 지은 한문 단편소설집이다.원래는 작품이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현재 5편만이 전해지고 있다. 판본(板本)도 김시습 자신이 돌방에 감추어서 세상에 내놓지 않았다고 한 만큼 간본(刊本)은 없고 필사본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 것을 일본에서 두 차례 번각(飜刻)하였고, 그 중 1884년에 나온 일본판(大塚本)을 육당 최남선(崔南善)이 1927년 국내에 소개함으로써 국내에 알려졌다. 김시습은 금오신화를 慶州 南山의 용장사(茸長寺)에서 저술하였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廢寺된 절이지만.....
지금은 폐허가 되었고, 삼층석탑, 마애석불, 석불대좌 등의 유물만이 남아있다. 이 곳에서 김시습은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神話)를 저술하였다. 경주 남산의 용장사지(茸長寺址).....
남아있는 5편의 단편소설은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등이다. 각 편들은 산 사람과 죽은 사람, 이승과 저승, 현실과 꿈들이 대립되는 세계에 속한 두 인물이 서로 만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 간단한 줄거리는 .....
"만복사저포기"는 남원에 사는 가난한 노총각 양생(梁生)이 왜구의 침입 때 정절을 지키다 죽은 처녀의 환신(幻身)과 만나 사랑을 나누다가, 처녀가 떠난 후 장가를 가지 않고 山에서 약초를 캐며 살았다는 내용이다.
"이생규장전"은 개성에 사는 이생(李生)과 최녀(崔女)가 부모의 반대를 극복하고 부부가 되었으나 홍건적의 난으로 崔女가 죽음을 당한 후 환신(換神)하여 李生과 부부생활을 한다. 崔女는 다시 떠나고 李生 또한 죽음을 택한다는 내용이다.
"취유부벽정기"는 송도에 사는 홍생(洪生)이 평양 부벽정에서 취해 놀다가 箕子朝鮮 마지막 王의 딸인 기씨녀(箕氏女)를 만나, 나라가 망한 사연을 듣고 울분과 감회를 나누다 헤어진 후 선계(仙界)로 간다는 내용이다.
"남염부주지"는 미신과 불교를 배척하는 경주의 박생(朴生)이 꿈 속에서 염라국에 가, 염왕과 토론하고 돌아온 후 염라국의 왕이 되어 세상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용궁부연록"은 송도의 한생(韓生)이 龍王의 초대로 龍宮에 가서 詩를 짓는 재능을 발휘하고 돌아온 후 세상의 名利에 뜻을 두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각 편들은 현실적인 것과 거리가 먼 신비로운 내용이라는 점에서 중국의 전기소설(傳奇小說)인 "전등신화(剪燈新話)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첫째, 崔女로 대표되는 굳건한 기상이나 의지를 지닌 한국적인 인물을 청조하였다는 점. 둘째, 공간적 배경을 조선으로 함으로써 주체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점. 셋째, 주인공들의 비극적 결말을 통하여 작가의 기구한 처지를 투영하고 있다는 점. 넷째, 愛民的 왕도정치 사상을 표출하고 있다는 점 등은 작가의 창작 의도를 알 수 있게 한다.
전등신화 剪燈新話
특히 儒家的 선비의 입장을 견지하던 주인공들이 불교적 因緣觀이 투영된 만남을 통해서 결국은 죽음이나 不知所終 (부지소종 .. 어디에서 일생을 마쳤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의미)의 道家的인 모습으로 귀결되고 있는 공통점은 儒, 佛, 道 3敎를 두루 통하고 화합을 지향하였던 작가의 철학체계가 잘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우리나라 소설의 발달 과정에서 볼 때 이 작품은 수이전(殊異傳)의 "최치원 이야기", 보한집(補閑集)의 " 이인보(李仁甫) 이야기" 같은 명혼설화(冥婚說話)와 삼국유사의 "調信 이야기" 같은 몽유설화를 계승하여 소설이라는 문화양식을 확립시켰고, 그 이후 소설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또한 일본의 전기문학인 도기보코(伽碑子)의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다.
매월당집 梅月堂集
김시습이 죽은 지 18년 후 中宗의 명을 받고 이자(李藉), 박상(朴祥), 윤춘년(尹春年)등이 유고를 모아 간행하였다.23권 6책으로 23권 중 15권이 詩集인데, 詩는 세간과 궁궐, 자연 등의 모든 분야에 걸쳐 생로병사, 성명이기(性命理氣), 음양유현(陰陽幽顯)에 이르기까지 다루지 않은 것이 없다.
이 가운데 遊關西錄, 遊關東錄, 遊湖南錄, 遊金烏錄과 같은 記行詩는 울분을 가라 앉히기 위하여 천하를 돌아 다니던 청년시절에 쓴 것인데, 특히 관서록에는 강개시(慷慨詩)가 많다. "관동일록"은 김시습의 나이 49세 때에 농사나 짓고 살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방랑의 길을 떠나 지은 것으로, 높은 경지에 이른 뛰어난 詩들이다.
탈 의 脫 意
만학천봉외 萬 壑 千 峰 外 만학천봉 저 너머
고운독조환 孤 雲 獨 鳥 還 외로운 구름과 새가 돌아 오는구나
차년거시사 此 年 居 是 寺 올해는 이 절에서 지낸다지만
내세향하처 來 歲 向 何 處 이듬 해는 어느 곳으로 갈꺼나
풍식송창정 風 息 松 窓 靜 바람이 자니 솔 그림자도 창에 고요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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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생오기단 此 生 吾 己 斷 이 生을 내 벌써 끊어 버리니
누적수운간 樓 迹 水 雲 間 발자취를 물과 구름 속에 남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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