仁山 -세발낙지 2012. 6. 3. 21:39

 

1.踏山日時 :2012.06.03.일

 

2.踏山場所 :전북 익산시 왕궁면 용화리 산33번지

 

3.現地日氣 :맑 음

  

4.明堂의 特徵  

  1)物形論 : 

  2)明堂內歷(陰,陽宅) :소세양(蘇世讓) 묘

                             중종 4년(1509)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을 거쳐 수찬에 재직 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복위를 건의, 현릉에 이장하게 하였다.

                             이후 사가독서를 했고, 1521년 영접사 이행(李荇)의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을 맞았으며, 

                             왕자사부 등을 지냈다.

                             이어 전라도관찰사·형조판서·호조판서·병조판서·이조판서·우찬성·좌찬성·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양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3)入首龍 :  

  4)坐  向 :  

  5)破  口 :

 

5.踏山後記 :소세양[蘇世讓, 성종 17년(1486)∼명종 17년(1562)], 자는 언겸(彦謙),

               호는 양곡(陽谷)·퇴재(退齋)·퇴휴당(退休堂), 시호는 문정(文靖),

               본관은 진주(晋州), 증조는 판도판서 소희(蘇禧),

               조부는 한성부판관 소효식(蘇效軾), 의빈부도사 소자파(蘇自坡).

               어머니는 사과 왕석주(王碩珠)의 따님 개성왕씨, 배위는 승문판교 조호(曹浩)의 따님 창평조씨이다.

 

                               

6.현장사진

 

 

 

 

 

 

 

 

 

 

 

[소세양(蘇世讓) 대감과 기생 황진이(黃眞伊)의 사랑]

 

  조선 중종 때 송도(개성) 삼절은 화담 서경덕(徐敬德)·황진이(黃眞伊)·박연폭포(朴淵瀑布)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 이름난 명기 황진이가 27세 때 소세양 대감을 송도에서 만났을 때의 이야기이다.

  소세양 대감이 젊었을 때 친구들에게 그 당시 이름을 날리던 황진이를 유혹해 한 달간 동거를 하리라

약속을 하고 송도에 와서 황진이를 만났다.

소세양이 먼저 황진이에게 인편으로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편지에는 단 하나의 글자만 적혀 있었다.

석류나무 류인 ‘榴’

이 편지를 받아 본 황진이도 역시 하나의 글자로 답장을 써서 보냈다.

고기 잡을 어인 ‘漁’

‘榴’의 뜻은 碩儒那無遊(석류나무류)로, 해석을 하면

 ‘큰 선비가 여기 있는데, 어찌 놀지 않겠는가‘라는 의미가 된다.

황진이의 답장 ‘漁’의 뜻은 高妓自不語(고기자불어)로 ‘높은 기생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다시 말하면 ‘높은 기생인 나는 마음에 드는 남자라도 먼저 꾀지 않으니까

네가 먼저 직접 와서 말하라.’는 뜻이 된다.

  둘은 그렇게 만나 한 달간 동거를 하였는데

당대의 문장가 소세양은 황진이가 아무리 재색을 겸비하였다지만

한 달 기한으로 그녀와 동거를 하고 나면 반드시 떠날 것이라고 친구들에게 호언장담을 하지 않았는가.

  꿈과 같은 한 달의 동거기간이 끝나고 이별을 할 때에 황진이는 멋진 시 한 수를 남겼다.

황진이와 소세양이 만월대에 올라 이별주를 나눈다.

그녀는 이별을 슬퍼하는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고 다만 이렇게 말한다.

“당신과 이별하면서 어찌 한마디 말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졸구를 올리고자 하오니 되겠습니까?”

  소세양이 그러라하자 그녀는 다음과 같은 율시를 노래하였다.

 

奉別蘇判書世讓(봉별소판서세양) / 소세양 판서를 보내며

月下庭梧盡(월하정오진) / 달빛 아래 오동잎 지고

霜中野菊黃(상중야국황) / 서리 맞은 들국화는 노랗게 피었구나.

樓高天一尺(루고천일척) / 누각은 높아 하늘에 닿고

人醉酒千觴(인취주천상) /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네.

柳水和琴冷(류수화금랭) / 흐르는 물은 거문고와 같이 차고

梅花入笛香(매화입적향) / 매화는 피리에 서려 향기로와라.

明朝相別後(명조상별후) / 내일 아침 임 보내고 나면

情意碧波長(정의벽파장) / 사무치는 정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

 

  이 시에 감동한 소세양은 다음과 같은 시를 노래하고 애초에 친구들과

 약속한 장담을 꺾고 다시 그녀의 곁에 머물게 되었다고 한다.

그 기간이 얼마동안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소세양은 황진이가 남자로서 사랑한 유일한 사람이 아니었나 싶다.

 

달빛 아래 소나무만이 푸르고

눈에 덮인 한포기 꽃들은 고개를 숙였구나.

강물은 하늘과 맞닿아 슬픈 줄을 모르고

쌓여가는 술은 그저 강물에 흘러갈 뿐

흐르는 강물은 나의 마음을 실어 보내주지 않고

저 멀리 절벽에서 살아남은 한포기 꽃은

아름다운 낙화를 보여주는구나.

내일아침 그녀를 보내고 나면

슬픔은 비가 되어 나의 몸을 짓누르리.

 

 

  황진이는 그 후 한양으로 간 소세양에게 시비(侍婢) 동선이를 통해 사무치는 그리움을 노래했는데 그 시가 다음과 같다.

 

 

蕭蓼月夜思何事(소요월야사하사) /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무슨 생각을 하나요?

寢宵轉輾夢似樣(침소전전몽사양) /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을 꾸나요?

問君有時錄忘言(문군유시녹망언) / 붓을 들면 때로는 제 이름도 적어 보시나요?

此世緣分果信良(차세연분과신량) / 저를 만나 행복 하셨나요? 저의 사랑을 믿나요?

悠悠憶君疑未盡(유유억군의미진) / 그대를 생각 하다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日日念我幾許量(일일염아기허량) / 하루에 제 생각 얼마만큼 하나요?

忙中要顧煩或喜(망중요고번혹희) / 바쁘실 때 얘기해도 제 말이 재미있나요?

喧喧如雀情如常(훤훤여작정여상) /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정겨운가요?

 

 

 

 

 

 

 

 

 

 

 

[소세양(蘇世讓) 묘비]

  1533년에는 진하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성주사고가 불에 타자 왕명에 따라 춘추관의 실록을 등사하여 다시 봉안하였다.

소세양은 타고난 성품이 밝고 순수하고 생각과 도량이 온화하고 너그러웠으며

단정하고 중후하며 평온하고 고요하였으며 삼가하고 침묵하여 말이 적었다.

외면으로는 우직함을 지키는 듯 하나 내면은 실로 과단성이 있었다.

 스스로 절조를 지키는 데에 독실하니 남들이 저절로 공경하고 감히 업신여기지 못하였다.

율시에 뛰어났으며, 글씨는 송설체를 잘 썼다. 익산 화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소세양(蘇世讓) 묘 후경 / 앞은 용화저수지]

 

 

 

 

 

 

 

 

 

 

 

 

 

 

 

[소세양(蘇世讓) 신도비]

  이 비는 1697년 전북 익산에 건립된 소세양신도비로 홍섬(洪暹)이 글을 지었고,

아들 소수(蘇遂)와 종질 소세영(蘇世榮)이 글씨를 썼으며,

심전(沈銓)이 전액하였다.

비는 낮은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으로, 받침돌은 윗면에 연꽃무늬를 두어 장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