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산/仁山 작은일상

슬픈 역사를 간직한 탄금대

仁山 -세발낙지 2012. 2. 22. 14:44

 

 

 

 

탄금대유래

 

명승 제42호 충주 탄금대(忠州 彈琴臺)의 유래를 알리는

 ‘탄금대 유래’에 잘못된 글이 수십 년간 방치되고 있으나 시정 되지 않고 있다.

충주시 탄금대 입구에 설치된 ‘탄금대 유래’비는 가로 2m, 세로 1m의 대형 돌에

 탄금대에 얽힌 역사를 설명하고 있으나,

 그 글 중에 임진왜란 당시 신립장군이 패한 사연에 대해

 ‘중과부족으로 패해 천추의 한을..“이라고 적었으나

이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밝혀졌다.

 

충주 탄금대는 우리나라 3대 악성 중 하나인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이라 하여 탄금대란 명칭이 붙은 곳이며,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이 소서행장과 맞서 싸우다 패전하자

 투신한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큰 명소이다.

또 남한강이 절벽을 따라 휘감아 돌고 울창한 송림이 우거져 있어,

 경관이 아름답고 대에서 조망되는 남한강과 계명산, 남산 및 충주 시가지와

넓은 평야지대가 그림같이 펼쳐져 절경을 자아내고 있는 곳이다.

 

 

 

 

 

 

 

"내년은 바로 옛날의 그 해입니다"
우리나라 전란사 중 가장 참혹한 패배
역사 연구는 물론 문학 소재로도 등장
조선시대 순조·고종때도 甲제사 지내
2012년은 임란 발발 '7甲'이 되는 해이다.

 


달천의 한자 표기는 '達川'이다. 여기서 '달래강'이라는 이름도 파생된 것으로 여겨진다.

달천의 지명 유래에 대해서는 '수달(獺)이 많이 살아서'와 '물맛이 달아서' 등 두가지 설이 존재하고 있다.

옛부터 달천수계에 수달이 많이 살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은 토산조에서 당시 충주에서 많이 나는 것으로

 철, 해송자(잣), 송이, 활석(일명 곱돌), 수달 등 5가지를 적었다.

 

후자에 대한 근거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택리지에 함께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달천의 물맛에 대해 '본조(本朝)의 이행(李行)이 능히 물맛을 변별하는데,

달천 물을 제일이라 하여 마시기를 좋아하였다'라고 적었다.

택리지는 충주목 조에서 '임진년에 명나라 장수가 달천을 지나다가 물맛을 보고

'(중국) 여산(廬山) 폭포의 물맛과 같다고 했다. 고을이 한강 상류에 있어서

물길로 오가기가 편리하므로 서울의 사대부들이 예부터 여기에 많이 살았다'라고 적었다.

이처럼 달천은 예로부터 물이 매우 맑았다.

그러나 청정수가 흐르던 달천은 1592년 피로 물들었다.

한국 전란사 중 가장 참혹한 패배가 이곳에서 일어났다.



◇신립은 왜 새재에 진을 치지 않았나

1592년 4월 13일이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병이 부산성을 공격했고,

이튿날에는 송상현이 지키던 동래성을 함락시켰다.

왜군은 부산에 상륙한지 열흘 남짓한 4월 24일 백두대간 동쪽 턱밑인 상주까지 올라왔다.

고개는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에서 길목을 차단하는 등 전술적인 이점이 있다.

따라서 과거부터 수비와 방어의 요충이 돼 왔다.

그러나 신립(申砬·1546~1592)은 백두대간 요충인

새재 대신 충주 탄금대 앞 개활지에 배수진을 치는 전략을 택했다.

신립이 왜 새재에 진을 치지 않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신립이 본래 기마에 능숙한 점과 조령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을 가능성 등이 거론되고 있다.

◇실록 속의 탄금대 전투

 
임란 탄금대 전투는 탄금대 산에서 벌어지지 않았다. 그 앞 개활지(푸른선)에서 벌어졌다.

도순변사에 임명된 신립은 처음에 150명의 군사와 함께 서울을 출발했다.

이후 제승방략(일종의 지역방어) 체제에 따라 모집병을 끌어들이면서

군사가 8천여명으로 늘어났다.

문제는 급조된 모집병에 있었다.

훈련을 물론 단합도 안 돼 있고,

여기에 도망병이 속출하는 등 말 그대로 오합지졸이었다.

 

'신립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곧장 말을 채찍질하여 주성(州城)으로 향하여 나아가니

군사들은 대열을 이루지 못하고 점점 흩어지고 숨어버렸다.

성중의 적이 호각 소리를 세 번 발하자 일시에 나와서 공격하니

신립의 군사가 크게 패하였으며,

적이 벌써 사면으로 포위하므로 신립이 도로 진을 친 곳으로 달려갔는데

사람들이 다투어 물에 빠져 흘러가는 시체가 강을 덮을 정도였다.'-<선조실록>

적지 않은 사람들이 탄금대 열두대를 신립장군의 자결 장소로 알고 있으나 그렇지는 않다.

신립은 탄금대 앞 개활지에서 전투를 했고 달천강에 투신했다.

선조실록은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신립은 포위를 뚫고 달천 월탄(月灘)가에 이르러

부하를 불러서는 '전하를 뵈올 면목이 없다'고 하고 빠져 죽었다.

그의 종사관 김여물과 박안민도 함께 빠져 죽었다.'-<선조실록>

전투에 참가한 당시 충주목사 이종장도 함께 희생됐다.

◇탄금대에서 기생끼고 풍악

종사관은 지금으로 치면 참모에 해당한다.

당시 신립의 종사관은 앞서 언급한 김여물(金汝山+勿·1548 ~ 1592)이다.

그에게는 김유(金流+玉·1571∼1648)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숭고하게 희생된 장소에서 기생을 끼고 풍악을 벌이며 놀다가 적발됐다.

서인들은 임진왜란이 끝나자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충·효로 포장된 강상윤리를 강조했다.

실록이 이례적으로 이 사건을 장문으로 다뤘다.

"김유가 충주에 왕래할 적에 기생을 데리고 풍악을 울리면서 탄금대 아래에서 술을 마셨는데,

그곳은 바로 그의 아비 김여물이 전사한 곳입니다.

자식이 된 자로서 자기 아비가 전사한 곳에 이르면 울부짖으면서 통곡하여 차마 그곳을 지나갈 수 없는 일인데,

그의 소행이 감히 이와 같았으니(…) 사판(仕版)에서 삭제시켜 인륜의 기강을 바루소서."-<선조실록>

이에 김유는 정황상 다른 사람을 사주해 억울하다는 상소문을 올리나 결국 파직당한다.

'괴산에 사는 진사 이정원 등이 상소하기를,

 "진천에서 충주로 갈 적에 김유가 본 고을에서 충주까지의 거리가 몇 리인가를 묻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충주는 우리 아버지가 전몰한 곳이다.

아버지가 죽었는데 자식은 살아서 오늘까지 그대로 있으니

이는 큰 죄악이다. 어찌 차마 그 땅을 밟을 수 있겠는가.

' 하고 목이 메이도록 울부짖으면서…'



 


 

 

충혼탑

 

이승만 대통령 친필로 쓰여진 충혼탑의 1호라는 사실을 문화해설사로 부터 처음들었다

탄금대에 지금도 선명하게 세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