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해정씨 시조묘 - 대양군
押海 丁氏 始祖墓
爲 置 : 신안군 압해면 가룡리 산165-2 정승동
坐 向 : 자좌오향(子坐午向)
破 口 : 정미파(丁未破)
踏山日時 : 2012,02,12
時 代 : 통일신라(추정) 1857년
내 력 : 정씨 시조묘는 압해정씨 도선산(都先山)이 있는 유두산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는데 우측 아래에는 추원재가 있다.
시조는 대양군 정덕성으로 당나라 덕종16년(800년)에 남양 대천리에서 출생하여 14세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당나라 무종떼에 대승상 겸 대양군에 봉작되었다,
선종7년(853년) 신라에 유배되었다, 유배 시 장남 정연도,차남 정우도와 함께 압해도에 입도하여 압해정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 후 장남은 "영광정씨파"차남"나주정씨파"로 분파되었다.
추원재는 압해정씨 문중제각으로 대양군,오성군,금성군,의창군 등 4위를 봉안하고 있으며, 1857년에 창건되어 한차례 중수된 건물이다.
규모는 정면 4칸, 측면2칸, 반이며, 팔작지붕이다.추원재 앞에는 정씨시조대양군행적비와 압해정씨 도선산을 조성하는데 공을 세운 3명의 공적비인 동계,우산,임간삼선생
공적종합비가 있다.
압해정씨 시조묘산도
압해면 가룡리 마을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약 1km를 더 들어가며 압해정씨의 시조묘가 있다.
이 곳은 압해정씨 일가에서 정일권 총리, 정래혁 장관, 정시채 장관, 정영식 차관,정종득 목포시장 등
우리나라 현대사의 거물급 인물들을 자주 배출한 곳으로 이름하여 정승동이라 부른다.
압해 정씨의 발상지 압해도
압해도는 섬의 지세가 삼면으로 크게 뻗어 있어서, 세 마리의 커다란 용이 마치 삼바리, 또는 트리포드(tripod) 모양으로
성난 바다의 파도를 억누르고 있는 형국으로서, 압해정씨(押海丁氏)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당나라의 대승상을 지낸 대양군(大陽君) 정덕성(丁德盛)이 853년(당나라 선종, 대중7년.신라 문성왕 15년) 군국사(軍國事)로
황제에게 직간을 하다가 우리나라의 압해도로 유배를 오게 되었는데, 살아 생전에 신원(伸寃)이 이루어지지 않아
이 곳에 묻히고 압해정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조선조 영조 때에 압해도가 나주에 부속되면서 본관을 ‘나주(羅州)’로 바꾸게 되었다.
그 뒤로 ‘창원’, ‘영광’, ‘의성’의 4본으로 늘어났으나 분파된 모든 본관의 도시조(都始祖)는 그들의 보첩에 정덕성(丁德城)으로 기록하고 있다.
후손으로는 ‘상춘곡(賞春曲)’을 지은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1401∼1481)과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 등이 유명하며,
근대 인물로는 정일권 전 국무총리와 정래혁 전 국회의장, 그리고 정해창 전 법무부장관 등이 있다.
멀리 송공산이 매화꽃처럼 물위에 둥둥 떠서 수구라성(水口羅星)으로 조응하여 곳간에는 재물이 넘치며 옥당에 홍화(紅花·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간 사람의 별칭, 또는 어사화의 별칭)가 만발한 형국이다.
다만 회룡고조(回龍顧祖)의 형국처럼 돌아앉아 혈을 맺고 마주 보는 병오방(丙午方)의 청룡안(靑龍案)이 수발(秀拔)하여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자손들이 고향을 떠나야 성공할 수 있다’는 소위 이향사(離鄕砂)를 겸하고 있는 것이 작은 흠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당나라에서 귀양을 와서 압해정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대양군의 묘
상당한 명당임에는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