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능 - 조선27대 마지막황제 순종묘역
1.踏山日時 :2011.10.30.일
2.踏山場所 :경기 남양주시 금곡동 141-1
3.現地日氣 :맑음
4.明堂의 特徵
1)物形論 :
2)明堂內歷(陰,陽宅) :순종(純宗,1874~1926),재위기간 (1907-1910.8), 부인2명 자녀없음.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재위기간 동안 통치권을 통감부에 빼앗기고, 일제의 강요로 한일신협약·기유각서
·한일합병조약 등을 체결했다. 이름은 척(拓). 자는 군방(君邦), 호는 정헌(正軒). 순종은 1874년(고종 11)
2월 8일 창덕궁 관물헌에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다음해인 1875년 2월 18일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882년(고종 19) 여흥부원군 민태호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했으며, 1897년(광무 1) 대한제국의 수립과 함께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1904년에 세자빈으로 맞이했던
순명효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어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딸을 황태자비로 맞이하니 순정효황후이다.
1907년 7월 19일 일본의 협박과 친일파 대신들의 강요로 황위에서 물러나게 된 고종의 양위를 받아 황제로
즉위했고, 연호를 융희로 고쳤으며, 동생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순종 즉위 직후인 1907년(융희 1)
7월 24일 일본은 한국을 병합하기 위한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을 강제로 체결하고, 1910년(융희 4)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조선 왕조는 27대 519년만에 멸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순종은 황제위에서 이왕(李王)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거처하며 망국의 한을 달래다가 1926년 4월 25일 53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순종의 인산일인 6월 10일에는 일반 백성들에 의한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능은 유릉(裕陵)이다.
3)入首龍 :
4)坐 向 :
5)破 口 :
5.踏山後記 :
6.현장사진
조선27대 마지막황제 순종초상
홍릉.유릉 주차장 단풍나무
ㅇ 조선 최초의 황태자비 : 정비 순명효황후 민씨(1872-1904)
정비 순명효황후 민씨는 1872년 계동에서 민태호의 딸로 태어나 10살 때 세자빈이 되었으며,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황태자비로 책봉되니 조선 최초의 황태자비이다.
러시아 통역관 김홍륙의 독차사건으로 성치 않은 몸이 된
순종의 性的문제 등으로 인하여 마음고생도 많았다고 하며후사 없이
순종이 즉위하기 전 1904년에 32세로 세상을 떠났다.
황태자비로 죽었으니 세자빈의 격에 맞추어
오늘날 어린이 대공원자리의 유강원(裕康園)에 초장되었다가
1926년 순종 승하 후 현 위치로 천장하여 합장 되었다.
ㅇ 조선 최초이자 마지막 황후 : 계비 순정효황후(1894-1966)
계비 순정효황후는 1906년 황태자의 계비로 책봉되었다가
1907년 순종이 즉위하자 황후가 되었다.
조선 최초의 황후이자 마지막 황후인 셈이다.
1910년 한일합방조약문에 찍으려는 옥새를 치마 밑에 감추고 저항한 일화는 유명하다.
나라 잃은 황후 윤씨는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서른 셋의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조선왕조 마지막 중전,마지막 황후로 당당하게 살았다.
창덕궁 낙선재로 거처를 옮겨 지내다가 해방 후 6.25전쟁을 맞아 낙선재로
쳐들어온 인민군들에게 "이 곳은 나라의 어머니가 사는 곳이다"라며 호통쳐서
내쫓는 일화 등이 낙선재를 지켜낸 당당한 기품이 전해져 온다.
ㅇ 순종은 흉지에 묻혔다?
오늘날 풍수술사들이 말하기를 순종은 흉지에 매장되었다고들 말한다.
그 평가나 주장을 이 곳에 모두 옮길 수는 없지만
마지막 황제 순종을 흉지에 묻은 이유는 음모론이라는것이다.
그동안 조선왕릉을 답사하면서 가끔 들었던 '모략의 풍수'와 비슷하다.
흉지에 매장함으로써 그 후손들을 절손시키고,
조선의 부흥을 아예 꿈도 꾸지 못하게 하려는 일제의 음모라는 것이다.
"해방이후 조선황실의 후손들은 대부분 생활고에 시달린데다가
남,북한 그 어디에도 정착을 못해 대부분 일본이나 미국으로 귀화했고,
이 땅에서 당당하게 활동하는 이는 극소수다" 이는 고종황제의 증손자가 한 말이다.
조선 왕실이 절손되기를 바라는 세력이 일본 뿐이었을까?
문득 당시 매국에 앞장선 친일파들이 떠오른다.
유릉(裕陵): 27대 순종과 정비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민씨,
계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의 합장릉
유릉은 조선의 마지막 陵이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 27대 순종 황제와 정비 순명효황후 민씨,
계비 순정효황후 윤씨 세 분을 봉분 하나에 함께 모신
동봉삼실릉(同封三室陵)으로 조선왕릉 중 유일한 형태이다.
정비 순명효황후는 순종이 즉위하기 전인 1904년(광무 8) 11월 5일 경운궁에서
세자빈의 신분으로 춘추 33세에 승하하였으며,
지금의 성동구 능동에 있는 어린이대공원인 양주땅 용마산 기슭의 유릉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53세로 승하하자
그 해 6월 11일 순종을 홍릉 오른쪽 산줄기 언덕에 장사지내면서
순명효황후의 능을 천장해 와 합장하였다.
1966년에는 순종의 계비 순정효황후가 1월 13일 춘추 71세로 창덕궁 낙선재에서 승하하여
유릉에 함께 안장함으로써 삼합장릉이 되었으며
이로써 조선왕실도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
ㅇ 조선의 마지막 왕릉
홍릉과 마찬가지로 능원의 기본 석물인 문무석인과 석수상이 침전 앞으로 내려오면서
석양과 석호가 사라지고 중국 명나라 황제릉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동물상이 등장한다.
홍릉에 비해 능역 규모가 다소 좁긴 하지만,
문무석인을 비롯하여 전체 석물의 조각은 홍릉의 것보다 사실적이면서 뛰어난 수법이 보인다.
특히 문석인은 특정인을 모델로 한 것처럼 사실적인 조각 수법을 보이고 있으며,
홍릉의 문석인과 같이 머리에 금관을 쓰고 있다.
능침에는 화문을 새긴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고,
가운데 혼유석과 사각 장명등이 있으며 양 옆에는 망주석이 새워져 있다.
홍살문과 침전의 바깥 공간에는 어정(御井, 임금이 사용하는 우물)이란 이름의 우물터가 남아 있다.
한 맺힌 순종의 유언
" 구차히 산 지 17년, 2천만 생민(生民 : 국민)의 죄인이 되었으니 잠시도 이를 잊을 수 없다.
지금의 병이 위중하니 한 마디 말을 않고 죽으면 짐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이 조칙을
중외에 선포하여 병합이 내가 한 것이 아닌 것을 백성들이 분명히 알게 되면 이전의 소위 병합
인준과 양국의 조칙은 스스로 파기에 돌아가고 말 것이리라. 백성들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어둠 속에서 여러분을 도우리라."
1926년 4월 25일 새벽 6시 15분, 평소 병약했던 조선 27대 임금 순종이
53세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위와 같은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신문에는 '5백 년 종사의 마지막 황상(皇上) 승하'라는 제목의 기사가 전면을 장식하였다.
그 해 6월 10일 발인하였는데,
순종의 발인 행렬이 유릉을 향하여 창덕궁 돈화문을 나서 단성사 앞을 지날 때였다.
황제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러 나온 수많은 군중 속에서 수천 장의 격문이 날아오르며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마지막 황제의 인산일을 기하여 6.10만세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순종의 마지막 유언을 백성들이 알 리 만무하였으나,
마지막 국왕의 죽음은 백성들의 독립에 대한 욕망을 더욱 고조시키게 된 것이다.
어 정
문인석과 무인석
비석에는 (순종효황제 유릉, 순명효황후 부좌, 순정효황후 부좌) 3인을 함께 새겼다.
1.
침전에서 좌측 끝에서 본 능침의 모습
2.
능침 전경. 3인 합장릉.
곡장과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으며,혼유석과 장명등. 좌우로 망주석 있다.
3.
병풍석과 난간석이 고풍스럽게 장식되었다.
4.
능침의 좌향이 침전과 홍살문과 일치하지 않고 서로 엇갈려 있는 모습
<능침 - 침전 - 홍살문>
조선의 약화와 代를 끊으려는 일제의 힘이 느껴진다.
ㅇ 조선왕실 (대한제국 황실)의 종말
이미 고종시대에 이르러 일본에 의한 내정간섭과 외교권 박탈, 합병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1910년 합병조약 이전에 이미 조선왕실은 망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고종 임금이 일본에 의하여 강제로 퇴위당하고 아들 순종에게 양위 한 뒤,
3년후 한일합병으로 망국의 한을 품고 지내다가 1919년 68세에 일제 독살설 소문 속에 세상을 떠났으며,
그 아들 순종은 이미 일본에 나라가 장악된 상태에서 즉위하여 3년만에 한일합병으로 퇴위 당한후
16년동안을 지내다가 1926년 4월 25일에 53세로 한많은 생애를 마쳤기에 하는 말이다.
하물며 고종, 순종실록은 후일 일본인들에 의하여 작성되었기에
순수한 의미의 조선왕조 실록이 아니라 할 수 있다.
어쨌거나 518년동안 이어온 조선왕실은 마지막엔 대한제국
황실이 되었지만 결국 풍비박산으로 망해버렸다.
일본의 식민지가 되니 왕실의 멸망뿐 아니라 나라가 亡하고 국민이 滅해버린것이다.
37년 일본식민지를 거쳐 해방이 되었으나 조선왕실,
아니 대한제국 황실이 그후 어떻게 되었는지 잘 알지 못한다.
대한제국 황실이 망한지 100년도 넘어 이제는 잊혀진 황실,
사라진 황손이 되어 버렸다.
덕혜옹주 이야기는 이제 소설속에만 남아 있으며,
마지막 황세손 이구는 2005년 일본의 한 호텔에서 객사한 후
아버지 영친왕의 영원(英園) 가까이 묻힌 뒤 2007년 7월 16일 창덕궁
낙선재에서 쏟아져 내리는 장대비 속 대상제(大祥祭=삼년상을 마치고 탈상함을 알리는 제사)를
300여명의 전주 이씨 종친들이 치루었다는 기사를 마지막으로
이제 더이상 황실의 황손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