仁山 -세발낙지 2011. 10. 23. 17:00

 

 

변강쇠와 옹녀묘

 

전설속에서만 들었을법한 이야기

그런데 실제 존재하고 있었다 .

함양 마천 금계마을에서 산청쪽으로 내려가다가 죄회전해서

 오르막이 시작되는 길로 가다가 보면

지리산천하제일문 오도재가 나온다.

오도재를 거쳐 함양읍쪽으로 내려서니...

변강쇠와 옹녀의묘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갈길을 멈추고 발길을 돌려 찿았다.

조금은 초라하게 보였지만,

그래도 찿는이가 있는지 비교적 관리가 되여 있는 것 같다.

과연 후손은 있었을까 ??

 

 

 

변강쇠 옹녀의묘 밑에 자리잡은 주막

너와집 형식으로 운치있게 냇가에다 아담하게 지었다.

 

 

 

 

옹녀샘

 

..............ㅎㅎ

옹녀가 그리도 세다말인가 ?

머얼리서 보고 물줄기가  너무도 세차 내려다 보았더니

옹녀가 옹녀가 그렇게 ...ㅎ

 

 

 

 

 

변강쇠와 옹녀의묘 오르는 길 중간중간에 놓여진 나체 석상

겨울에 추워서 어쩔라고 ...그렇게 빨가 벗겨놓았는지...

 

 

 

 

 

 

 

 

이 나체 석상은 변강쇠와 옹녀의 양면 나체석상

앞면은 옹녀요 뒷면은 변강쇠라...

 

 

 

변강쇠 가(歌)

조선 말기에 신재효가 판소리 열두 마당 중 하나로 연행되던 「변강쇠가」를 판소리 사설로 정착한 작품.

 

 

유랑민들의 비극적 생활상을 희극적으로 형상화한 「변강쇠가」

「변강쇠타령」이나 「가루지기타령」, 「송장가」, 「횡부가(橫負歌)」라고 불리기도 한다.

「변강쇠가」는 원래 조선 후기에 연행되던 판소리 열두 마당 중의 한 곡으로,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에 있는 백장암 계곡이 주요 무대이다.

현존하는 작품은 신재효(申在孝)에 의해 판소리 사설로 정착된 「변강쇠가」만이 있을 뿐,

다른 판소리처럼 소설화되어 전하는 것은 없다.
신재효가 사설로 정착시킨 시기는 작품 중의 “신사년괴역(辛己年怪疫)”이란 구절을 통해 신사년(1881) 이후로 추정된다.

또한 조선 말기의 명창 송흥록·장자백 등이 잘 불렀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19세기 말까지 연행되다가 20세기 이후 판소리의 전승 과정에서 소리의 맥이 끊겼음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박동진신재효 사설을 바탕으로 소리를 재현하여 가끔 부르고 있다.



 

 

 

「변강쇠가」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는 평안도의 음녀(淫女) 옹녀와 삼남(三南)의 잡놈 변강쇠가 청석골에서 서로 만나 함께 사는 내용이다.

옹녀는 여러 도회지를 전전하며 들병장사·막장사 등으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노력하는데,

강쇠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온갖 못된 짓을 저지른다.
이에 옹녀는 강쇠를 달래어 지리산으로 옮겨 살게 되었는데,

어느 날 강쇠가 땔감으로 장승을 베어다 때어 장승 동티로 죽게 된다.

후반부는 이렇게 죽은 강쇠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시신을 치우는 과정이 복잡하게 전개된다.
결국 뎁득이가 강쇠의 상을 치르는 것으로 끝맺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많은 인물,

특히 사당패·풍각쟁이패·초라니 등 유랑 연예인의 등장과

그들의 놀이 모습은 조선 후기 하층민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이 작품은 단순히 음란한 성에 대한 경계보다,

하층 유랑민의 비극적 생활상이 광대들의 자술적 전기와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가 있다.

19세기 농촌공동체의 경제적 분화 과정에서 발생한 유민층이 농촌 공동체를 지키고자 했던

집단에 의해 패배해 간 사회적 현실이 잘 반영되어 있다.

 

 


 

2011.10.22.삼정산 숲속 변강쇠와 옹녀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