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 김병로선생 생가 - 초대대법원장
1.踏山日時 :2011.06.12.일
2.踏山場所 : 전북 순창군 복흥면 하리 519번지 사창마을
3.現地日氣 : 초여름날씨 무지 더운 날이다.
4.明堂의 特徵
1)物形論 :
2)入首龍 : 辛戌龍 - 후덕하게 내려와서 정확한 지점은 애매모호하나 생가좌향으로 가늠해본다.
3)坐 向 : 戌坐辰向
4)破 口 : 右旋水 - 艮寅破 - 서출동류(西出東流)명당수 -
5)明堂內歷(陰,陽宅) :대법원은 12일 가인의 생가인 순창군 복흥면 답동리에서 이용훈 대법원장과 가인의 손자인
김종인 전청와대 경제수석, 윤영철 전 헌법재판소장, 김완주 전북지사 등이 수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가인연수관’ 기공식을 열었다.
이용훈대법원장은 치사에서 먼저 “가인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변호사로 활동하며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들의 변론에 앞장섰고, 거족적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의 중추로도 활약했다”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초대 대법원장에 취임해 식민사법의 잔재를 청산하고 사법부 독립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 가인김병로 선생은 누구?
대법원에 따르면 가인 선생은 1887년 12월15일 전라북도 순창에서 사간원 정언을 지낸 부친 김상희와 장흥 고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은 러일전쟁 중 목포에 정박 중인 일본군함을 보고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 담양 일신학교에서 서양인 선교사로부터 산술와 서양사 등을 배웠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 선생은 전북 태인에서 거의한 최익현 의진에 가담했고, 의진이 해산된 이후에는 순창의 김동신 의진에 참여해 활동했다.
일제의 호남대토벌작전으로 의병활동이 어려워지자 가인 선생은 고정주가 설립한 창흥의숙에서 수학했다. 이후 1910년 일본으로 건너가 명치대학과 일본대학 법과에서 공부하다가 귀국했다.
1912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명치대학과 중앙대학 고등연구과에서 수학했고, 일본유학 중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기관지인 ‘학지광’의 편집을 담당하는 등 민족계몽운동에도 힘썼다.
1915년 귀국해 보성전문학교 등에서 후학을 양성했고, 1919년 경성지법 변호사로 개업했다. 1923년 선생은 형사변호공동연구회를 설립해 김상옥 의사 사건, 광주학생 사건, 수양동우회 사건 등 이른바 시국사건 즉 독립운동사건을 무료로 변론했다.
또한 안창호 등 민족운동가와 관련된 사건의 변호도 맡아 그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선생은 교육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조선교육협회 창립발기인, 보성전문학교 상임이사 등을 맡았으며, 1923년에는 조선민립대학기성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생가앞 명당이 넓은 들판으로 물이 내파는 동류하고 외파는 서출하며 환포를 하고 있어 대단하게 느껴으며,
별로 그렇게 썩어 눈에 들어오는 명당터라는 느낌은 못받았다.
지금 살고 계시는 풍양조씨 조기호어르신은 병진생(76세)라고 하는데 얼굴에는 주름한점없이 팽팽하니 좋은 건강을 유지하고 계시다는 느낌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옛날 가인 생가터는 571평이었다고 하나 지금 3필지로 나누어져 별로 그리 좋은 인상은 못받았다...
현재 순창군에서 복원을 할려고 하나 지금 살고계신분들께서 완강하게 반대를 하셔서 복원이 빨리 이루어 질지 의문이다. 그리고 지금대문은 옛날대문하고 입구가 다르다고 함.
그리고 지금살고 계신 어르신이 아픔과거가 있는지 이런 말씀을 해 주신다. 일기를 쓰고 싶은데.일기를 쓰면 잊을것을 못잊는 것이 나쁘다고 하셔서 참 다시한번 생각해보게한다..군청에서 복원을 하자고 몇번씩이나 찿아오고 하셨다고 하신데 선뜻 못 내어주신것이 어르신 부모가 물려주신거라고 끝까지 지키고 싶단다.
6.현장사진
마을 뒷산의 운기로 뭉친 바위
생가터 입구 안내 표지판
마을입구 출생지 표지석
가인선생의 생가터
기이하게도 생가터 뒷쪽에 떼죽나무가 옛날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채 지금도 꿋꿋하게 살아있다.
생가터 뒤쪽 바위
생가터에서 본 안산의 모습
생가터에 살고 계신 풍양조씨 조기호 어르신이
생가의 내력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하고 있다.
생가의 내력을 품고 살아가는 떼죽나무
생가터 지붕뒤쪽에서 본 안산의 모습
생가터에서 본 좌청룡쪽
생가터에서 본 우백호쪽
생가터 뒤쪽까지 밀고내려온 맥석
옛날에는 개집있는데가 대문이었다고 한다.
생가터인데 지금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지금은 3필지로 나누어졌다.
여기도 옛날에는 생가터자리였단다.
우백호쪽 봉우리
좌청룡쪽 봉우리
머얼이서 본 생가터 뒤쪽 웅장한 주산의 모습
5.踏山後記 : 복원이 안된상태로 보존이 되고 있어서 아쉬움은 남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