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진송씨 - 송인수 묘소
1.踏山日時 : 2011.04.24.일
2.踏山場所 : 충북 청원군 문의면 남계리 산69-3번지
3.現地日氣 : 답산하기 좋은 봄날씨 바람이 많이 붐
4.明堂의 特徵
1)物形論 : 용이 먹이를 먹고 배가 부른상태에서 아직 소화가 덜 된모습으로도 보임.혈 좌,우측이 불룩불룩해
아직 미완상태라 발복이 오래가지 않나 싶다.
2)明堂內歷(陰,陽宅) : 시조 : 송대원(宋大源)
송대원(宋大源)은 여산송씨의 시조 송유익(宋惟翊)의 아우 송천이의 후손이다.
송천익이의 후손은 대대로 은진에서 살아왔으나 송천익 이후의 대는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고려때에 판원사를 지내고 은진군에 봉해진 송대원(宋大源)을 시조 및 1세 조상으로 하고 본관을
은진으로하였다.
송인수 [宋麟壽, 1499~1547]
본관 은진(恩津). 자 미수(眉叟). 호 규암(圭庵). 시호 문충(文忠). 1521년(중종 1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정자(正字)를 지내고 1523년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1526년 수찬(修撰)을 지내고
대간(臺諫) 때 김안로(金安老)의 재집권을 막으려다가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
1534년 신병으로 인해 돌아왔다가 다시 김안로의 미움을 사 사수(泗水)로 유배되었다.
1537년 김안로 등이 몰락하자 승지(承旨)로 재등용되었고,
형조참판 때인 1544년 동지사(冬至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성이 되어 유생(儒生)들에게 성리학(性理學)을 강론했다.
그 뒤 대사헌 ·이조참판을 역임했으나 윤원형(尹元衡) 등의 미움을 사서 전라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545년 을사사화로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서 파직되어 청주에 은거하다가 윤원형 등에 의해
사사(賜死)되었다.
성리학(性理學)의 대가로 선비들로부터 추앙받았다. 청주 신항서원(莘巷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규암집(圭庵集)》이 있다.
3)入首龍 : 미,곤,신룡으로 내려왔는데...당판이 넓어 가름가 여간 힘들다.
4)坐 向 : 곤좌간향이다
5)破 口 : 파구는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길목이라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5.踏山後記 : 묘소에 도착하자 빗방울이 한,두방울 떨어진다. 운이 좋아서 그런지 후손이라고 하신는 분이 대전에 사시는데 묘역정리 때문에
오셨다고 하시면서 잠깐 선대에 대해 설명을 해 주신다.그러면서 이 묘소는 품자 형인데 아래쪽은 송인수부부 묘이고,
위쪽은 아들(송응경)묘역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보기에는 역장인듯 싶은데,
후손께서는 아버지가 아들을 업고 있는 보호하고 있는 형국이라고 하신다.
규암 송인수는 우암 송시열 작은 증조부다, 전순이 풍부하고 양명하며,양쪽에는 마치 용맥을 제어하는듯한 겁지(劫地)첩신되어
확실한 용진(龍盡)이룬다.
멀리 올려다 보니 후현무 뒤쪽 산이 높이 솟았다 내려오면서 과협이 잘 되였다.
그리고 당판이 넓어 점혈하기가 상당히 어려웠을것으로 판단, 그리고 묘소 앞 전순이 길어 발복이 오래가지않나 싶다.
그리고 문명의 이기주의라고나 할까 앞으로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바람에 후대발복은 어떻게 일어날지 궁금하다.
6.현장사진
은진송씨 - 송인수 묘역전경
품자형 묘역
위쪽이 송인수 아들 송응경묘
아래쪽이 송인수 부부합장묘
송인수 후손이라고 하시는 분이 열심히 설명중이다.
안산인데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바람에 앞으로 전개될 일에 대해서는 지켜볼일이다.
규암 송인수 비문
규암 송인수 정부인 안동권씨 지묘
위쪽에 있는 송인수 자 송응경 비문
좌향이 곤좌간향이다.
입수룡이 곤신룡이다.
과협부분
안산쪽으로 보고 촬영한 모습
송응경지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