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장사와 김덕룡장군 묘소
1.踏山日時 : 2011.01.15.토
2.踏山場所 : 광주 북구 금곡동 1023
3.現地日氣 : 매서운 겨울찬바람에 손,발이 꽁꽁
4.明堂의 特徵
1)物形論 : 장군대좌혈
2)明堂內歷(陰,陽宅) : 중국절강성 지관들이 잡어준 자리
◎무등산(無等山) 정기와 김덕령(金德齡) 장군
호남평야의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역사의 온갖 풍상을 받아내온 이 웅장한 용(龍)은 그 기세가 매우 후덕하고 너그럽다. 즉 산세는 웅대하지만 경사는 완만한 토산(土山)인 것이다. 어느 봉우리가 특별히 높다 할 것 없이 모두가 비슷하게 ‘한일(一)’자 형으로 뻗어있으니, 이름하여 ‘무등(無等)’이다. 호남의 얼굴이요, 광주의 기상인 무등산은 그래서 품안의 제 새끼들을 올곧게 가르친다. 고려 태조때부터 차령 이남은 배역의 산세라 하여 그 사람들을 경원시하였지만, 이런 어처구니없는 풍수이론의 최대의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전라도의 기백은 결코 죽어본 적이 없다.
이곳 정상일대의 입석대·서석대·수신대를 기점으로 하여 북쪽 능선을 따라 가면 오른쪽으로 화순군과 담양군이 이어지고, 왼편으로는 광주직할시가 펼쳐진다. 산 정상에서 북서진하여 무등산장(無等山莊)을 지난 용맥은 광주시 금곡동에 이르러 하나의 명혈을 맺었으니, 곧 ‘장군대좌혈’이다. 그 혈의 기상이 대단하여 2백만 이상의 군대를 거느릴 엄청난 대장군이 날 자리다. 이 자리가 바로 김덕령 장군을 탄생시킨 천하대명당으로써 무당산의 의로운 정기가 만들어낸 ‘만고의 충신’이 날 터인 것이다. 김붕섭이라는 이가 광주 무등산 아래 석저촌에 살고 있었다. 때는 조선 명종때였고 그의 본관은 광산이었다. 그의 집에 어느 날 손님이 찾아왔다. 말하는 투로 보아 중국인들 같은데 의사소통이 안 되니 필담(筆談)을 주고받게 퇴었다. 그들은 붕섭의 집에서 유숙하기를 청했다. 그들이 무엇하는 사람인지, 이곳에는 왜 왔는지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낮에는 방안에서 빈둥거리고 밤이면 밖에 나가서 한참 있다가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그런지 사흘째 되는 밤에 붕섭은 그들의 뒤를 몰래 뒤쫓아 가보기로 작심하였다. 달빛은 명랑하고 밤기운은 청랑하니, 마침 소슬바람도 불어 야행치고는 제법 쾌적한 맛이 있었다. 그들의 뒤를 따르던 붕섭은 어느 지점에선가 발을 멈추었다. 그들이 자신의 바로 앞에서 열심히 떠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을 들어 여기저기를 가리키기도 하고 무엇인가를 땅바닥에놓고 서로가 수군거리는 것을 보아 ‘지관이 아닐까’생각해보았다. 붕섭은 재빠르게 되돌아 내려오며 중국의 지관들이 머나먼 조선땅의 벽촌에까지 왜 왔을까 하며 내심 염두를 굴리고 있었다. 다음날이 되었다. 그들은 짐을 꾸려 떠날 차비를 하며 한 달 후에 반드시 다시 올 테니 그때도 잘 부탁하겠노라고 했다. 그리고는 은덩이 몇 개를 건네주니 붕섭의 처는 그저 희색이 만면이었다. 그들이 떠나고 나자 붕섭은 전날 밤 뒤따라 가서 보아 두었던 그 자리에 올라가보았다. 붕섭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리(地理)를 잘 알지 못하는 자신의 눈으로 보아도 천하대명당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었다.
‘옳구나, 그 중국 사람들이 지관은 지관이었던 모양이구나. 이렇게 좋은 자리를 찾아 여기까지 왔으니 반드시 명당임은 틀림없겠지, 그렇다면···.’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담박에 자신의 아버지묘를 이장하기로 작정하였다. 그곳이 어떤 자리인지, 좌향을 어떻게 놓아야 하는지도 정확히 모른 채 그는 무조건 아버지의 묘를 이장해 버린 것이다. "이 자리는 천하 명당 장군대좌혈로써 2백만 내지 3백만의 군대를 지휘하는 대장군이 날 터입니다. 십만도 채 안 되는 군대를 가진 조선에서는 써도 소용이 없는 자리이니, 제발 우리에게 양보해 주십시오." 자손 중에서 반드시 천하대장군이 날 것이나, 좁은 조선땅에서는 그 기개를 펼 수 없을 겝니다. 게다가 묘의 방향이 약간 틀어졌으니, 일대의 영웅호걸이 꽃피지도 못하고 젊어서 죽을 운명에 닥칠 것입니다. 죽음만큼은 면할 수 있도록 분금(分金)을 고쳐 줄 테니 그것은 허락하시겠소?" 이렇게 하여 무등산의 정기가 혈을 맺은 천하 대명당은 분금이 잘못 놓인 채로 수백 년을 내려오게 되었다. 김덕령은 무등산 장군대좌혈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인물이다. 그 용맹과 지혜로움이 일세에 위용을 떨쳤으나 무고로 인해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다.
3)入首龍 :
4)坐 向 :
5)破 口 :
5.踏山後記
김덕령 장군의 본관은 광산, 시호는 충장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부사와 장성현감의 천거로 종군 명령이 내려졌으며, 전주의 광해분조로부터 익호 장군의 군호를 받았다. 1594년 선전관이 된 후,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협력하여, 여러 차례 왜병을 격파하였다. 충청도의 이몽학(李夢鶴) 반란을 토벌하려다가 이미 진압되자 도중에 회군하였는데, 이몽학과 내통하였다는 무고로 체포·구금되었다.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杖毒)으로 옥사하였다. 1661년(현종 2) 신원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참의(參議)에 추증되었다. 1678년(숙종 4) 벽진서원에 제향되었고, 영조 때 의열사에 형 덕홍, 아우 덕보와 병향 되었다. 1974년 광주 충장사를 복원하여 충훈을 추모하고 있다.
6.현장사진
충장사안내도
충장사 안내문
충장사 외삼문 충용문
충장사 원경 - 주산이 천을태을
눈밭에 꿋꿋하게 서있는 모과나무
충장사 내삼문 익호문
충장사 사당 - 김덕룡장군 영전을 모시는 곳
김덕룡장군 영전
맨 위쪽 묘소가 김덕룡장군 아버지묘소
그 다음 중간이 김덕룡장군 고조부모 묘소
이 묘를 중국지관들이 절강성에서 와 잡아준 자리
이 묘를 인해서 김덕룡장군이 태어났다는 전설
맨 아래가 김덕룡장군묘소 1974년에 이장이 되었다고 함.
김덕룡장군 유물전시관
김덕룡장군 묘 이장시 수습했던 내관과 외곽 목관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