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의정을 지낸 충희공 이인손 묘
右義政 李仁孫
이인손(李 仁孫1395~1463)의 본관은 광주(廣州),자는 중윤(仲胤),호는 풍애(楓厓)이다.
아버지느 참의 이지직(李之直)이다.1411년(태종11)생원시에 합격하고 1417년 식년문과에 동진사로 급제하여 검열에 발탁되었다.
그 뒤 사헌부 감찰을 거쳐 1429년(세종11) 천추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이어 형조좌랑,예조좌랑,집의,판군자감사,예조참의,경상도관찰사,
형조참의,대사헌,한성부윤등을 역임하였다.
원래 영릉자리에는 이직(성주이씨),이인손(광주이씨),이계전(한산이씨)등 여러 양반가 분묘들이 있었는데,
광주이씨 문중에는 이인손묘의 천장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우의정 이인손이 죽어 장례를 치를 때에 지관이 당부하기를 "앞으로 이 분 아드님들은 금시발복하여 머지않아
고관대작이 속출할것이니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이곳에 재실을 짖지 말고 근처에 있는 개울에는 다리를 놓지 말라"고 하였다
이인손 선생 묘역 원경
과연 지관의 말대로 이인손의 아들 5형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차례로 현달하니,
큰아들 극배(克培:광릉부원군)는 관찰사를 거쳐 영의정이 되었고,
둘째 극감(克堪:광성군)은 형조판서,
세째 극증(克增:광천군)은 성균관동지사,
네째 극돈(克墩:광원군)은 좌찬성,
다섯째 극균(克均:광남군)은 좌의정이 되었다.
이인손선생 묘역 뒤에서 바라본 모습
하지만 재실을 짓지 말고 다리를 놓지 말라던 지관의 당부는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예종이 즉위하면서 세조때부터 논의되어 오던
영릉의 개장(改葬)문제가 다시 거론되었다.
이에 예종은 재상들을 나누어 각지에 파견시켜 능자리를 선택케하니,
한 패는 광주이천을 거쳐 여흥 땅을 답산하게 되었다.
이인손선생의 묘역 전경
대신과 지관이 사방팔방을 둘러보다 한 산기슭에 정기가 어리어 있음을 보고
그를 따라 산을 내려와 찿았으나 아름드리의 울창한 나무들이 하늘을 덮고 있어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마침 개울 저편에 돌다리가 보이는 지라 요행히 길을 찿아 들어가는데
난데없이 천둥,번개가 요란하면서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일행들은 당황하여 폭우를 피하려고 사방을 둘러보니
머지않은 곳에 묘막과 비각이 보였다.
급히 그리로 가서 비를 피하려고 있으니까
잠시 뒤 비가 멈추고 날이 청명해졌다.
이곳이 이인손의 묘소라는 것을 알게 된
대신과 지관들은 구경삼아 묘소를 둘러보던 중
천하의 명당임을 알고 탄성을 금치 못했다.
坐向은 寅坐申向이다.
이들이 곳 돌아와 예종에게 복명하였고,
예종은 평안도 관찰사로 있던 이극배를 불러 이인손의 묘를 천장하라고 명하였다.
이인손의 묘를 헤치고 유골을 들어내니
그 밑에서 비기가 나왔다 그 비기에는
"이 자리에서 연을 날려 하늘 높이 오르거든 연줄을 끊어라
그리고 연이 떨어진 곳에 이 묘를 옮겨 모셔라"
고 하는 구절이 적혀있었다.
여러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 그대로 하였더니,
과연 연을 바람에 날리어 서쪽으로 약 10리쯤 되는 곳에 떨어졌다.
그리하여 이인손으 묘소를 이 곳으로 옮겼고,
이 후로 이 동네 이름을 연주리(延注里:지금은 여주군 능서면 신지리)라 부르게 되었다.
연주리는 연줄이 떨어진 동네라는 뜻이다.
右白虎쪽
뒤쪽 主山 龍脈이 내려온곳
사당과 재실
광주이씨 제실 숭묘제
사당과 제실 전경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신지리 237-1
사당과 제실 전경
2010.10.30.토
- 仁 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