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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에 총지사터는 과연 명당이었을까?

仁山 -세발낙지 2010. 9. 16. 14:31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 대치리 승달산(僧達山)에 있었던 절. 신라 성덕왕 때 서역 금지국(金地國)에서 온 정명(淨明)이 승달산의 지맥인 백운산(白雲山)에 창건하였으며, 신라 말에는 혜통(惠通)이 이곳에서 수도하였다. 1016년(현종 7) 화재로 인하여 절이 소실되자 백운산 밑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중창하였는데, 사찰의 정교함은 호남지방에서 으뜸이었다고 한다.

당시 총지마을일대는 모두가 총지사의 사역으로서 승려의 수가 800명, 암자는 9개소, 승방은 200동이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 절은 1810년(순조 10)을 전후하여 폐찰이 되었다. 당시에 충청도 석성현감을 지낸 임면수(林勉洙)는 총지사 뒤에 아버지의 묘를 썼는데, 승려들이 이에 반대하여 묘에 참나무 말뚝을 박아버렸다.

임면수는 즉시 사찰의 철거를 명하였으나 승려들이 이에 불응하자 절에 불을 질러 폐사로 만들었는데, 승려들의 일부는 분신(焚身)하고 일부는 법천사(法泉寺)로 피신하였다고 한다. 당시까지 이 절은 장성 이남에서 출가하는 사람들의 도승지(度僧地)였다고 하며, 많은 도승(道僧)들이 배출되었다.

현재 법당터에는 주초석(柱礎石) 18개가 가로 90m, 세로 80m의 크기로 서로 연결되어 이동이 불가능한 상태로 남아 있으며, 주위 150여 정보의 산능성에는 승려들이 다녔던 통로가 있다.

또한, 총지마을 입구에는 7m 간격으로 석장승 2기가 세워져 있는데, 높이 175㎝, 둘레 220㎝이며,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2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석장승은 총지마을을 지키고 잡귀를 막아주는 수문장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밖에도 절터에는 금선(金扇), 금으로 만든 바둑판, 금동 자비, 금마(金馬), 청기와 등이 매장되어 있다고 하나 확인할 길이 없으며, 불당골·중샘·촌전야지·중들청기와터·낡은 절·절안·원통암(圓通庵) 등의 지명만이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務安郡의 文化遺蹟(國立木浦大學博物館, 1986)
 
 
 

총지사(摠持寺)를 생각하며 - 김 웅


  어느 잡지의 월평에서던가 내 소설을 일컬어 "발로 쓴 작품"이라고 말씀한 평론가가 있었는데, 요즘도 나는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소설을 쓰기 전에 이것 저것 자료를 꼼꼼히 챙기는 버릇은 여전하다.

  총지사(摠持寺) 총만 하더라도 연전에 무안문화원으로부터 집필을 의뢰받은 실명소설(장편)의 자료를 섭렵하다가 우연찮게 찾아낸 비극의 현장이었다고나 할까? 이 소설의 첫 무대가 무안 일대와 영산강 주변이어서 이 지역의 문화 유적들을 다시 살피다가 '순하디 순한 시골 할머니와 고집스러운 시골 할아버지'를 연상시키는 석장승에 눈길이 멎었다. 그것은 이마에 백호가 뚜렷이 새겨진 두 기의 돌미륵이었는데 그곳 장승거리가 바로 몽탄면 대치리 승달산 기슭, 총지사가 있던 총지마을이다. 절의 규모가 어찌나 컸던지 승방만도 200동에 거기서 기거하며 수도하는 승려의 수가 무려 800명이었으며, 산내의 암자만도 9개소였다. 절의 규모 못잖게 건축물의 정교함은 호남지방에서 으뜸이었다고 했다. 1810년(순조 10년) 방화로 전소되던 그 당시까지도 장성 이남에서 출가하는 승려들의 도승지(度僧地)였다니까, 교계에서의 위치 또한 대단했으리라 여겨졌다. 헌데 그토록 규모가 큰 사찰이 오늘날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로 전소되고 만다.

  당시 충청도 석성현감을 지낸 임면수(林勉洙)는 풍수지리에 미쳐 이른바 명당 터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듯 싶다. 예의 양반 나으리께서 내노라 설쳐대던 지관들을 거느리고 명당 터를 찾아 삼남 일대를 뒤지다가 마침내 승달산 기슭에 당도한 것이었다.   지관들이 이구동성으로 손뼉을 치면서 환호작약한 건 바로 그때였다. 이곳이야말로 조선 팔도에서 제일가는 명당 터라는 것이었다. 지관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임면수라는 그 양반 나으리께선 그 곳을 대뜸 선친의 묘터로 결정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주지스님을 비롯하여 800여 명을 헤아리는 승려들이 모두 반대를 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예의 양반 나으리께서는 우격다짐으로 법당 뒤뜰의 담장까지 허물고는 거창하게 묘역까지 조성하여 아비의 유골을 이장하고 말았다. 참다못한 젊은 승려 몇이서 화풀이를 겸해 참나무 말뚝을 깎아서 몰래 그 묘에 때려박아버렸다. 뒤늦게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임면수가 노발대발하여 절을 모조리 허물어버리겠다면서 승려들의 퇴거를 명령했다. 승려들이 이에 불응하자 강제로 승려들을 끌어내는 한편 가복들을 시켜서 사찰에 불을 지르고 말았다. 승려들의 항거는 거셌다. 죽기를 작정한 승려들은 함께 법당으로 들어가 염불을 외며 꿈쩍도 않았다. 임면수는 강제로 끌려나와 인근에 있는 법천사로 보내진 일부의 승려들을 제외한 기백 명의 승려들을 절과 함께 불살랐다. 결국 승려들은 앉은자리에서 숨지고 만 것이다.

  이상이 총지사 승려들의 집단분신사건의 전말인데, 승려들이 저항의 수단으로 분신(焚身)을 선택한 게 아마 이 사건이 최초가 아니었나 싶다. 이 일은 조선왕조 제 16대 임금인 순조 10년(1810년)에 있었던 일이다. 그 이듬해인 1811년 해남에 있는 대둔사(대흥사)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일어났다. 현직에 있는 가리첨사란 벼슬아치가 부하들을 이끌고 한밤중에 대둔사에 들이닥쳐 횃불을 켜들고 창고를 뒤지다가 불씨가 떨어져서 큰불이 일어난 사건인데, 이 불로 천불전을 비롯하여 사찰의 큰 건물 아홉 동이 전소되고 말았다.

  아버지의 묘에 해코지했다는 이유로 법당에서 염불하며 저항하는 기백 명의 승려들 암냥에 200여 동의 대가람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임면수나, 한밤중에 들이닥쳐 사찰의 창고를 뒤지다가 큰불을 내고만 가리첨사의 행위가 허용되었다는 것은 조선 오백 년간의 불교가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는 얘기가 된다. 심지어 승려들로 하여금 한양(서울) 사대문 안의 출입조차도 엄격히 금하다가 구한말 통감부 시절에 이르러서야 그것도 일본 승려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마지못해 승려들의 도성 출입이 허용되었을 정도이니, 유교를 숭상하던 양반 나으리들께서 '중놈' 대하기를 마치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 대하듯 했었다는 사실이 실감난다.

  각설하고, 척불(斥佛)을 통치이념으로 삼아 드러내놓고 불교를 박해했던 조선 오백 년 동안 온몸을 내던져 불합리한 제도에 저항했던 승려가 적잖았을 터인데 아쉽게도 한국 불교사에는 그러한 기록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있다해야 민초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는 전설이나 설화로만 남아있을 뿐인데, 잘 정리되어 보존된 한국 기독교(천주교) 박해사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불교학자나 종단에서도 더 늦기 전에 이 부분에도 눈을 돌려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필자도 올해부터는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불교 박해와 저항의 현장을 발굴 답사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김 웅

저항의 현장·소설집 [고잔삽화], [환상의 벽], [초가], [철수와 영이의 비둘기집], [논두렁 밭두렁], [보리수 그늘], [땅따먹기]외 다수가 있음. 경남문학상, 흙의 문예상, 울산광역시문화상 수상.

 

 

 

총지사지 석장승 (摠持寺址石長丞) 


지정번호 :  전남민속자료 제23호

지정년도 :  1987년 6월 1일 

소  재 지 :  전남 무안군 몽탄면 대치리 543-1 

분     류 :  신앙자료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 대치리에 있는 장승.


1987년 6월 1일 전라남도민속자료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총지사는 신라 성덕왕 때 승려 정명(淨明)이 승달산의 지맥인 백운산 총지마을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신라 말기에는 혜통이 이곳에서 수도하였다. 고려시대인 1016년(현종 7)에 소실되어 지금의 위치로 옮겨 중건하였다.

당시 총지마을 일대가 모두 이 절의 사역(寺域)이었고, 승려 800명, 암자 9개소,

승방은 200동이었다.

그뒤 석성현감을 지낸 임면수가 이 절 뒤에 아버지의 묘를 썼는데, 승려들이 반대하여 묘에참나무 말뚝을 박았다. 임면수는 즉시 절의 철거를 명령하였으나. 승려들이 이에 불응하자1810년(순조 10)에 불을 질러 폐사시켰다. 현재 사지에는 주초석(柱礎石) 18개가 남아 있으며총지마을 입구에 석장승 2기가 세워져 있다.


석장승은 1666년(현종 7)에 지금의 총지사를 중건할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남장승은높이 145㎝, 폭 95㎝이며, 여장승은 높이 172㎝, 폭 85㎝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머리는 민둥머리이다. 눈은 왕방울눈이고, 코는 우뚝 솟은 주먹코이다. 입은 작고 다물었다.

전체적으로 소박한 조각을 하였다. 사찰 입구에 세워져 있으며, 신앙석상(信仰石像)으로서 수문신(守門神), 경계신(境界神), 벽사신의 역할을 한다. 장승 앞에는 제단이 놓여 있으나 이곳에서 지내는 정식 의례(儀禮)는 없으며, 사람들이 찾아와 소원을 빈다.

                                                          석장승

 

                                                           석장승

 

                                                     총지사 터





               총지사 위에 위치한 묘

 

 

호승예불혈 171

관리자 2005-09-30 오후 6:24:00

승달산.jpg

- 천하 名穴, 성덕(聖德)과 부(富)의 길지 승달산에 -


<승달산>






전남 광주(光州)와 목포(木浦)사이에 있는 무안(務安)에 이르면 목포대학교(木浦大學校)가 있고 그곳으로부터 남쪽으로 약 5km쯤 떨어진 곳에「승달산(僧達山:318m)」이 있다.

이 산은 목포에 있는 유달산(儒達山:223m)과 쌍벽을 이루는 산으로 그렇게 크지도 높지도 않은 아담하고 청초(淸楚)한 산이다.




이 산을 승달산(僧達山)이라고 한 것은 1122년(고려 인종때) 원(元)나라 원명(圓明)이 이산에서 교세(敎勢)를 크게 떨치고 그의 제자 5백여명이 모두 달도(達道)한 후부터라고 한다.

이 산에는 법천사(法泉寺), 목우암(牧牛庵) 그리고 총지사(摠持寺)등이 있는데 법천사는 신라 성덕(聖德)여왕 24년 금지국(金地國)의 스님 정명(淨明)이 창건 했고 고려 현종조인 1030년 화재가 난 후 일백여년 뒤인 인조대왕 때(1122년) 이 자리를 청계(淸溪)쪽으로 옮겨지었으나 또 다시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의한 불로 겨우 불상과 불구(佛具) 일부만 목우암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목우암은 성명스님이 창건하였다고도 하고 승달산 정기를 받은 목동(牧童)이 득달(得達)때 지은 절이라고도 하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법천사에서 20여리를 송정마을 쪽으로 가면 총지사 절터가 있는데 신라(新羅)때 혜통(惠通)이란 중이 당(唐)나라에 건너가 3년간 공부한 뒤 665년에 개산(開山)하였다하며 총지종파(摠持宗派)로서 1424년에는 전남지방의 천태, 조계(天台, 曹溪)등과 합쳐 90여동에 달하는 거찰(巨刹)이었으나 1810년경에 폐찰(廢刹)되어 절터만 남아 있고 500m거리에 석장승(石長僧) 2개가 입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이 절이 폐찰된 것은 당시 충북 석성현감(忠北 石成顯監)을 지낸 임면수(林勉洙)라는 인물의 세도 때문이었는데 그의 부친 묘를 절 뒷층에 쓰자 중들이 사찰경내에 묘를 썼다고 직접적인 항의는 못하고 참나무 말뚝을 묘지 가운데 박아 버렸다. 후에 이를 안 임면수가 중들을 쫓아버리고 절에 불을 질러 버렸다고 한다.




또한 이 절이 세워진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조선조 중엽 신적리(新積里)마을에 박(朴)씨와 이(李)씨가 살았었는데 두 성씨는 평소 사이가 나빴으나 이씨의 아들과 박씨의 딸은 부모들의 관계와는 달리 서로 사랑했고 이를 안 박씨는 딸을 죽이려하므로 박씨의 딸은 이씨에게만 알리고 승달산속 암자에 몸을 숨겼는데 이곳 암자의 주지승이 이 처녀를 겁탈하고 말았다. 박씨 딸로부터 고백을 들은 이씨 아들은 이 암자로 쫓아가 중을 죽이고 암자에 불을 지른 뒤 남녀가 함께 불속에 뛰어 들어가 죽었다. 그 후 서로 원수처럼 지내던 이씨와 박씨는 비로소 화해한 뒤에 마음을 합쳐 법천사를 짓고 두 남녀의 원혼을 위해 빌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유적을 담고 있는 승달산은 상제님께서 궁을가에 있는 사명당 갱생이란 말은 중 사명당이 아니라 밝을 명자를 쓴 사명당이니 조화는 불법에 있으므로 호승예불을 쓴다(행록 5장 15절)하신 곳으로 지금까지도 누가 이 혈을 썼다는 확인을 할 수 없는 채 다만 넓은 지역을 두고 「여기일 것이다 저기일 것이다」하는 막연한 공론만 있을 뿐이다. 다만 각자 나름대로 많은 사람들이 여러 곳에 호승예불이라 하여 썼을 뿐인 것이다.

그러면 「호승예불혈」에 대한 내용을 보기로 하자.

호승예불혈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탄생을 전후한 시기에 고승 도선(道詵)대사의 비결에 나타나며, 일지승(一指僧)같은 명사들이 남긴 비결록에 의하여 유명해진 것이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호승예불혈을 찾으려고 답사하였으나 지금까지도 미궁에 쌓인 보물을 찾는 것처럼 되어 있다. 이 혈은 대간룡(大幹龍)등의 일대간룡(一大幹龍)이 진(盡)하여 맺어진 혈이기 때문에 천하명혈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산맥은 곤륜산 제4지맥이 입우동해 하여 백두산이 생겼고 여기서 발원하여 금강산을 거쳐 태백산에 이르러 두 갈래로 갈라져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되어 이대간룡(二大幹龍)은 동해(東海)와 서해(西海)로 흘러들어 갔다.

소백산맥은 내장산(內藏山)을 거쳐 방장산(方丈山) 불갑산(佛甲山)을 지나 연등(淵燈) 산하(山下) 승달산에 이르러 천리여장(千里旅裝)을 풀고 머무른 것이다. 옛부터 「간룡진처(幹龍盡處) 필시대결(必是大結)이라 한 말처럼 반드시 대혈이 이곳에 있음은 사실인 것 같다.

옥룡자의 비결록 중 일부만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사십삼절(四十三節) 건해맥(乾亥脈)의 승달산이 특립(特立)하니

금수병창(錦繡屛搶) 들렀는데 우리스승 계시도다

건곤간손(乾坤艮巽) 특립(特立)하니 왕자사전(王子師傳) 혼이 나고

병정손신(丙丁巽辛) 높았으니 장원급제(壯元及弟) 대대(代代)로다

호로산(葫蘆山)이 나타나니 여락궁비(女洛宮妃)할 것이요

운무귀지(雲霧貴地) 하였으니 응천상지(應天上之) 삼광(三光)이라

토불토이(土不土而) 작금(作金)하니 현혹심(眩惑心)되오리라

북진천주(北辰天柱) 높았으니 각우주지무궁(覺宇宙之無窮)이라」

여기에서 내장산(內藏山)이 태조산(太祖山)이요 방장산지기백(方丈山之氣魄)이며 소조산(小祖山)이 승달산(僧達山)인데 그 성덕(聖德)은 천하에 으뜸이요 부(富)는 천하에 무적(無敵)이고 성현(聖賢)이 탄생할 수 있는 기상을 지니고 있다 한다.




이와 같은 대혈이기에 상제님께서 공사를 행하실 때 무병장수(無病長壽)는 선술(仙術)에 있으니 오선위기(五仙圍碁)혈이요. 국태민안(國泰民安)은 군신봉조(君臣奉照)혈이요 선녀직금(仙女織錦)혈로 창생에게 비단옷을 입힌다(행록 5장 15절)고 하실 때 무안의 호승예불(胡僧禮佛)을 말씀하신 것이라 여겨진다.

이번의 답사를 통해 우리 선조들은 참으로 명당에 대해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었다. 승달산을 가보니 너무나 많은 묘가 여기 저기 빽빽하게 있고 심지어는 아주 높은 산정(山頂)까지 비석을 세워 나름대로 호승예불이라고 자처하고 있었다.

진짜 그 혈이 어디인줄은 잘 알지 못하지만 그곳에 사는 할아버지의 말을 들어보면 일제(日帝)시대에 왜인(倭人)들이 그 혈을 잘라 버리기 위해 움막을 짓는다 속이고 혈을 파헤쳤다고 한다.




당시 왜인들 중에는 지리학에 통달(通達)한 사람이 있어 한국에 인물이 배출(輩出)되면 한민족(韓民族)을 영구히 자기들의 식민지(植民地)로 만들 수 없으리라는 이유에서 우리나라 도처에 명혈대지(名穴大地) - 충남(忠南) 대덕군(大德郡) 구측면(九側面)에 소재한 금반하엽형(金盤荷葉形)과 계룡산하(鷄龍山下)에 마화위룡(馬化爲龍)혈 등 - 여러 곳을 파괴한 사례(事例)가 흔히 있었다 하니 참으로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이곳만은 상제님께서 공사를 보신 곳이니 다행스러움을 느끼며 대혈(大穴)의 진기(眞氣)가 태동하기를 진심으로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