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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룡(玉龍)은 살아있다
仁山 -세발낙지
2010. 1. 14. 18:31
[전남] 옥룡(玉龍)은 살아있다 (2)
[데일리안 박혜범 데일리안광주전라 편집위원]옥룡(玉龍)은 살아있다.
曦陽縣 白鷄山 有古寺曰玉龍 師遊歷至此 愛其幽勝 改葺堂宇
희양현 백계산 유고사왈옥룡 사유력지차 애기유승 개집당우
洒然有終焉之志 宴坐忘言 三十五載
쇄연유종언지지 연좌망언 삼십오재
희양현(曦陽縣 광양) 백계산(白鷄山)에 옥룡(玉龍)이라는 옛 절이 있는데, 대사께서 산천을 다니시다가 여기에 오시여 그 그윽한 경치를 좋아하시어 당우를 중수하시고 청정하게 일생을 마치실 뜻으로 고요히 앉아서 말씀을 잊은 지 35년이나 되었다.
< 옥룡사 도선국사 비(碑) 본문에서 발췌 >
國師法孫 雲巖寺 住持 重大師志文者 以其事訴屈于大史氏
국사법손 운암사 주지 중대사지문자 이기사소굴우대사씨
大史氏逐取 旨 召光陽縣貢舡 載其石 送于玉龍寺
대사씨축取 지 소광양현공강 재기석 송우옥룡사
도선국사의 법손(法孫) 운암사(雲巖寺) 주지(住持) 중대사(重大師) 지문(志文)이 그 일을 태사국(太史局)에 고하여 태사국(太史局)에서 임금의 교지를 받들어 광양에서 공물을 싣고 온 배에 그 돌을 실어 옥룡사로 보냈다.
- 중간 생략 -
門人玉龍寺住持重大師 臣志文奉宣立石
문인옥룡사주지중대사 신지문봉선입석
문인(門人) 옥룡사 주지 중대사(重大師) 신(臣) 지문이 왕명을 받들어 비를 세웠다.
- 중간 생략 -
咸通六年乙酉 創雲巖寺
함통육년을유 창운암사
함통(咸通) 6년(865)에 운암사(雲巖寺)를 창건하였다.
< 옥룡사 도선국사 비음기(碑陰記)에서 발췌 >
본문 "옥룡(玉龍)은 살아있다."의 목적이 옥룡사와 운암사의 위치는 밝히는 것이므로, 위 도선국사 비문에서, 옥룡사와 운암사는 광양 백계산(백운산)에 있었고, 개성 국청사(國淸寺)에서 제작된 비가 광양현 공물선(貢物船)으로 옥룡사에 도착하고, 이 비를 주관하여 세운 지문(志文) 대사가 옥룡사와 운암사의 주지직을 겸직하고 있었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옥룡사와 운암사는 별개의 사찰이 아닌 같은 산내 본사와 부속암자의 관계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으며, 앞으로 전개될 내용의 핵심이다.
따라서 관심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이 글을 읽는다면, 좀더 이해가 쉬울 것이다.
앞서 일러두기에서 설명했듯이, 언제부터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득한 옛날부터 광양의 백계산(白鷄山)은 백운산의 이름이었고,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삼신산의 우두머리인 방장산(지리산) 남쪽에서 옛 이름 백계산 그대로 그 자체가 마치 백운산 정상을 머리로 치켜든 흰 닭이 "순천 서면(西面)"과 "구례 간전면(艮田面)"에, 두 발(계족산(鷄足山)이 동서에 각각 있음,)을 딛고, 동서(東西)로 날개를 활짝 펴고, 북쪽을 향하여 홰를 치며, 새 아침 즉 새로운 세상을 알리는 모습이며, 그런 연유로 예로부터 그 이름을 백계산이라 하였다.
曦陽縣 白鷄山 有古寺曰玉龍 師遊歷至此 愛其幽勝 改葺堂宇
희양현 백계산 유고사왈옥룡 사유력지차 애기유승 개집당우
洒然有終焉之志 宴坐忘言 三十五載
쇄연유종언지지 연좌망언 삼십오재
희양현(曦陽縣 광양) 백계산(白鷄山)에 옥룡(玉龍)이라는 옛 절이 있는데, 대사께서 산천을 다니시다가 여기에 오시여 그 그윽한 경치를 좋아하시어 당우를 중수하시고 청정하게 일생을 마치실 뜻으로 고요히 앉아서 말씀을 잊은 지 35년이나 되었다.
< 옥룡사 도선국사 비(碑) 본문에서 발췌 >
國師法孫 雲巖寺 住持 重大師志文者 以其事訴屈于大史氏
국사법손 운암사 주지 중대사지문자 이기사소굴우대사씨
大史氏逐取 旨 召光陽縣貢舡 載其石 送于玉龍寺
대사씨축取 지 소광양현공강 재기석 송우옥룡사
도선국사의 법손(法孫) 운암사(雲巖寺) 주지(住持) 중대사(重大師) 지문(志文)이 그 일을 태사국(太史局)에 고하여 태사국(太史局)에서 임금의 교지를 받들어 광양에서 공물을 싣고 온 배에 그 돌을 실어 옥룡사로 보냈다.
- 중간 생략 -
門人玉龍寺住持重大師 臣志文奉宣立石
문인옥룡사주지중대사 신지문봉선입석
문인(門人) 옥룡사 주지 중대사(重大師) 신(臣) 지문이 왕명을 받들어 비를 세웠다.
- 중간 생략 -
咸通六年乙酉 創雲巖寺
함통육년을유 창운암사
함통(咸通) 6년(865)에 운암사(雲巖寺)를 창건하였다.
< 옥룡사 도선국사 비음기(碑陰記)에서 발췌 >
본문 "옥룡(玉龍)은 살아있다."의 목적이 옥룡사와 운암사의 위치는 밝히는 것이므로, 위 도선국사 비문에서, 옥룡사와 운암사는 광양 백계산(백운산)에 있었고, 개성 국청사(國淸寺)에서 제작된 비가 광양현 공물선(貢物船)으로 옥룡사에 도착하고, 이 비를 주관하여 세운 지문(志文) 대사가 옥룡사와 운암사의 주지직을 겸직하고 있었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옥룡사와 운암사는 별개의 사찰이 아닌 같은 산내 본사와 부속암자의 관계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으며, 앞으로 전개될 내용의 핵심이다.
따라서 관심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이 글을 읽는다면, 좀더 이해가 쉬울 것이다.
앞서 일러두기에서 설명했듯이, 언제부터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득한 옛날부터 광양의 백계산(白鷄山)은 백운산의 이름이었고,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삼신산의 우두머리인 방장산(지리산) 남쪽에서 옛 이름 백계산 그대로 그 자체가 마치 백운산 정상을 머리로 치켜든 흰 닭이 "순천 서면(西面)"과 "구례 간전면(艮田面)"에, 두 발(계족산(鷄足山)이 동서에 각각 있음,)을 딛고, 동서(東西)로 날개를 활짝 펴고, 북쪽을 향하여 홰를 치며, 새 아침 즉 새로운 세상을 알리는 모습이며, 그런 연유로 예로부터 그 이름을 백계산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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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계산(白鷄山) 운암사지 전경 ⓒ 데일리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