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풍수의 사회학
제7강-권력과 풍수의 사회학
권력과 풍수의 사회학
- 역대 대통령들의 풍수관
- 역대 대통령들의 생가 및 조상묘를 통해서 본 대통령들의 풍수 인식
천자 2명이 나올 자리로 이장한 이하응
1846년 훗날 고종 황제의 아버지로서 흥선대원군으로 불리게 된 이하응은 지관(地官) 정만인(鄭萬仁)의 도움을 얻어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남연군) 묘를 가야산 밑으로 이장한다.
<천자가 2명이 나올 명당 자리>를 택해서 이장한 것이다. 2만냥의 거금과 묘터에 있던 가야사를 불태우며 이장한 것이다. 황현 선생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남연군의 묘는 <복지형>의 명당이라 한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853년에 둘째 아들 명복(命福)이 태어나고, 명복은 나이 12살 되던 해인 1863년 임금이 된다. 그후 그는 임금에서 황제로 즉위한다. 결국 고종 황제와 순종 황제 두 명이 나왔으니 예언된 풍수설이 그대로 실현된 셈이다.
하의도에서 용인으로 이장한 김대중 총재 부모 묘소
그로부터 150년 후인 1995년의 일이다.
당시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는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에 제왕이 나올 자리(남북 통일의 지도자가 나올 자리)에다 아버지와 어머니 묘를 이장했다. 1996년 월간 『신동아』 7월호에 실린 안영배 기자의 특종에 따르면, <지관 손석우는 최근 들어 용인군 이동면 묘동에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의 부모 묏자리를 잡아준 것으로 밝혀졌다. 김대중 총재의 용인 묘역은 천선하강(天仙下降: 신선이 하강하는 형상)의 명당으로 대통령이 나올 자리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97년 말, 김대중 후보는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846년과 1995년 사이의 약 150년 동안 풍수에 관한 한 변한 게 없다. 왕조가 바뀌고, 사회경제 체제가 바뀌었지만 풍수지리에 관한 한 바뀐 것은 전혀 없었다. 혹자는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고 반박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풍수와 권력과의 결탁의 역사는 아주 길다.
<삼국지>의 조조와 DJ의 풍수 활용 사례
풍수지리의 역사는 2000년이 넘는다. 권력과 풍수가 결탁해 온 역사는 아주 길어 풍수지리의 역사와 더불어 시작한다.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가신의 말―조조의 운에 맞는 토운(土運)의 땅으로 가야 한다―에 따라 황제를 협박, 수도를 낙양에서 허도로 옮겼다. 이후 그는 실권을 장악했다. 또한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도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동교동에서 일산 자택으로 자택을 옮겼다. 풍수들의 소문에 의하면 동교동의 지기(地氣)로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풍수적 이유 때문이었다.
수 양제의 풍수 활용 사례
또한 수나라 문제(초대 임금)의 부인이 죽게 되었을 때, 그의 둘째아들 양제는 지관(소길)을 찾아가 <둘째아들(양제)인 내가 황제가 될 자리로 어머니 묘소를 봐달라>고 부탁했고, 결국 그 덕분에 얼마 후 황제가 되었다는 얘기가 있다.
이처럼 풍수를 활용, 권력에의 접근을 꾀한 것은 과거 및 오늘의 역사에서 증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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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대 대통령의 풍수관은 대동소이하다
김대중 대통령만이 풍수를 활용한 것은 아니다. 역대 대통령의 풍수관, 묘지관을 살펴보면 모두가 풍수지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문명 발달과 자연과학과 상관없이 묘지 풍수가 먹혀들고 있다. 풍수는 사람들에게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활용되고 있다.
권력의 정당성 유지에 활용된 풍수
가장 큰 이유는 획득한 권력을 정당화시켜주는 가장 좋은 도구로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참(圖讖)적 이유, 여러 유언비어로 권력 획득의 정당성 유지에 활용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90년대에서야 비로소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최고 권력자를 국민이 직접 선출하였다. 대개 권력을 부정으로 장악하는 자들은 무력으로 일단 권력을 장악한 다음 그것을 정당화시켜 나갔다. <천명이 바뀌었다!>느니, <구국을 위한 역사적 결단!>이라는 둥 예나 지금이나 그 구실은 비슷하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용비어천가」를 창작케 하여 자신의 건국을 정당화했듯 풍수지리는 획득한 권력을 정당화화기 위해 효율적으로 활용되었다.
<제왕지지 帝王之地>의 터와 민의(民意)의 호도
그 조상의 무덤 혹은 생가가 <제왕지지 帝王之地>의 터라고 이야기하면 일단 조작된 <왕권 신수설>은 백성과 국민들에게 먹혀 들어간다. 이것은 단지 권력을 획득한 이들에게만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부정과 불의로 엄청난 부를 획득한 이들에게도 적용된다. 선조의 무덤이 천하의 명당이라거나 거부가 나올 집터에 태어난 사람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그러면 그렇지!> 하고 수긍한다. 그러나 불의로 탈취하고 축적한 권력과 부에 대한 정당화 수단으로 단지 풍수지리만이 악용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 권력과 풍수의 오랜 결탁의 역사를 설명할 수 없다.
동기 감응 이론이 가진 선동성과 혁명성
권력과 풍수지리의 결탁에는 내적 이유가 있다. 풍수지리의 핵심 이론인 동기 감응이 갖는 선동성과 신비성 및 혁명성이 가장 큰 원인이다. ―인간과 자연,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아우르는 천지간에는 일정한 기가 충만하다. 그 기를 매개로 인간과 자연이 감응하고,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감응을 한다는 게 동기 감응 이론이다. 이는 음택 풍수와 양택 풍수로 대별된다― 한국의 전현직 대통령들은 모두 불법적 혹은 합법적 방법으로 권력 획득의 한 방법으로 풍수를 적극 활용했다.
운명론적 사고에 도전하는 풍수적 관념
전두환·윤보선·노태우 전 대통령 및 김대중 대통령 등 전현직 대통령이 모두 풍수를 활용했다. 풍수지리에 대한 적극적 사고 방식의 한 면으로 이에 대한 고전 『금낭경』을 보면 <신이 하는 바를 빼앗아 천명을 바꾼다 奪神工改天命>라고 표현하고 있다. 조선조 때 홍경래와 전봉준 등도 이 풍수지리의 신비성, 혁명성을 적극 활용했다. 이러한 운명을 거부하는 적극적 사고 방식이 동아시아 고유의 사고 관념으로 이야기된다.
운명론적 사고에 도전하는 풍수적 관념
<하늘을 따르는 자는 흥하고, 하늘을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는 <순천자흥 역천자망 順天者興 逆天者亡>이라는 순천 사상이 동양 사상의 주류이다. 스스로 자신의 운명뿐만 아니라 집단의 운명을 고칠 수 있다는 <탈신공개천명 奪神工改天命> 사상은 풍수지리와 금단술(金丹術)이 대변한다. 그러나 금단술은 한 개인의 불노장생만을 꾀하는 이기적 차원에 한정되는 반면, 풍수지리는 하늘이 부여한 인간의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다는 혁명적 반자연적 사고가 묘지 풍수에 악용되었을 때 권력 획득 수단으로 묘지 이장이 이루어진다.
윤보선 전 대통령의 풍수 활용
풍수지리는 권력과 철저하게 밀착되어 있었다. 그러나 결코 의도적으로 풍수지리가 권력에 아첨하며 달라붙지 않았다. 윤보선 전 대통령 조상 묘가 명당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윤대통령 부인 공덕귀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흉년이 들었던 어느 해, 하루는 5대조 할아버지댁 하인들이 길을 지나가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스님 한 분을 보게 되었다. 하인들로부터 이 소리를 전해 들은 할아버지께서는 즉시, 그 스님을 집으로 데려오라 하여 정성스레 돌봐 주었다. 마침내 건강을 회복한 그 스님은 답례로 5대조 할아버님 산소 자리를 지명해주었는데, 스님이 봐준 산소 자리 임자는 이순신 장군(덕수 이씨) 집안의 땅이어서 정당하게 묘를 쓸 수 없어 암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스님의 말에 따라 5대조 할아버님을 그곳에 암장하였고, 나중에 지금 <뒷내>라고 불리우는 그 명당에 모셨다.]
암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설화들
굶주려 쓰려져 있는 중을 구해 주고 그 보답으로 명당을 소점해 주었다는 이야기는 풍수 설화에 오래 전부터 등장하는 소재이다. 그보다 15세기 세종 임금 당시 성주 이씨 문중의 이야기도 이와 동일하다. 성주 이씨 가문의 이야기 외에도 굶어 죽어 가는 중을 구해주고 명당을 구했다는 설화는 여러 곳에서 들린다. 그 설화는 암장(暗葬)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윤보선 전 대통령이 서거 후에 국립묘지에 묻히지 않고, 지금 5대조 할아버지가 묻힌 충남 아산의 선산에 묻힌 것은 그곳이 명당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윤보선 전 대통령 집안은 기독교 가문이었다. 하지만 풍수지리는 그 집안의 또 다른 종교였던 셈이다.
전두환 전대통령 조부 묘의 암장
전두환 전대통령의 삼촌이 풍수에 능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아버지 묘―전두환 전대통령의 조부 묘―를 못재라고 불리우는 성산에 암장하였다. 그런데 이곳은 전씨 문중의 다른 파의 종중 산이었다. 그 무덤을 쓰고 나서 가난하게 태어난 그가 장군이 되고, 대통령이 되었다 한다. 자신의 말에 따르면, 움막골 생활을 할 정도로 엄청나게 가난했던 집안이었다고 한다.
경남 합천 생가 부근에 자리잡은 묘터인 그곳은 전문 지관이 자리잡은 명당이다. 그곳에는 신우지지(자기가 묻힐 자리)도 있다. 이 신우지지는 윤보선·전두환 전 대통령 및 김대중 대통령의 부모 묘소에 있다.
이장하여 대통령이 된 노태우 전대통령의 부친 묘
노태우 전대통령 역시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다. 마을 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부친을 불당골에 모셨는데 군대에서 일이 안 풀렸다. 1962년 소령이 되고, 1968년에 중령에 진급할 정도였다. 이에 풍수에게 물어보니 묘에 물이 찼다 하길래 송정동에 산을 구한 뒤 묘를 파보니 실제로 물이 차 있었다. 1968년 이전에 이장했는데 그 이후 진급도 하고, 무슨 일이든지 승승장구하였다고 한다. 운이 많이 따랐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의 증언으로 보아 노태우 전 대통령이 아버지 묘를 이장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모 묘에 대한 김두규 교수의 답사 메모
【<노태우 전대통령의 아버지 노병수(盧秉壽) 어머니 김태향(金泰香) 묘 건좌선향(乾坐巽向) 임자내룡(壬子來龍)에 정파(丁破)>로 수법 이론을 따진 것 같지는 않다. 내룡(來龍) 확실. 무덤 뒤 바위들로 내맥을 형성, 무덤 뒤로 수많은 고분(古墓)이 있음. 일자문성(一字文星). 무덤들 가운데 맨 끝에 위치. 가장 좋은 자리. 옛날 공동묘지 혹은 광주 이씨 선산인 듯. 함께 어울려 사는 원만한 성격을 드러내 보인다. 좌향도 제대로 맥을 따라 썼고, 좌청룡이 겹겹이 둘러쳐져 있다. 수구(水口)에는 독봉(獨峰)이 우뚝하면서 듬직하게 서 있어 돈도 있겠다. 혈장(穴場) 자체는 우선(右旋)인데 바위로 형성됨. 주변 사(砂)들이 토성(土星)과 금성(金星) 물형론으로는 모란반개형(牧丹半開)형이라 할까? 대단한 자리는 아니나 이장 후 상주에게 힘이 되었겠다.】
기독교 장로 김영삼 전 대통령 집안의 풍수지리
독실한 기독교 가문의 김영삼 전대통령 역시 풍수지리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그의 조부모 및 어머니 묘를 답사하면 풍수지리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김영삼 전대통령의 선영은 고향 마을인 경남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 대계 마을 앞에 있다. 그의 생가에서 모두 바라보이는 곳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54년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전후에 조부, 조모, 모친이 사망했다. 국회의원의 신분인 만큼 집안 일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였다. 조부모 묘의 특징을 한마디로 하면 장군이 칼을 차고 있는 형국, 즉 장군패검형(將軍佩劍形)의 명당이다. 전반적으로 기운이 왕성하여 아랫사람을 많이 거느리는 형상이다.
어머니 묘는 제왕지지로 손색이 없다. 주산의 형태는 토성(土星)으로 아름답다. 역시 다른 역대 대통령의 선영과 생가에서 볼 수 있는 산의 형세이다. 토성에서 무덤이 있는 혈장으로 이어지는 산 능선은 마치 용이 꿈틀거리듯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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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명당으로 일컬어지는 박대통령 조모의 묘
역대 대통령들이 이처럼 종교와 무관하게 풍수지리를 신봉, 권력 획득의 한 방편으로 활용했다. 박정희 전대통령 셋째형 박상희 씨가 1930년대에 잡은 할머니 묘소는 풍수적 조건에 맞는 천하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박상희는 그곳에 미리 암장한 듯 추후 그 땅을 매입했다 한다. 이처럼 박대통령 집안도 좋은 묘터를 쓴 편린을 엿볼 수 있다.
역대 대통령 생가터의 공통점
역대 대통령 생가의 경우 놀랄 만한 공통점, 즉 풍수에 맞는 특정한 지형 지세를 갖추고 있다.(추후 <주택 풍수> 강좌에서 이를 살필 예정)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는 산속의 와혈(소쿠리 명당)이라면, 김대중 대통령 생가는 바닷가의 겸혈(삼태기 명당)이다. 서로의 태생적 분위기가 맞지 않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할머니 묘는 실제 발복을 받을 수 있는 구체적 힘을 주는 혈장과 내룡이 분명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김대중 풍수 탄압
풍수지리를 통한 권력에의 접근 못지 않게 풍수를 통한 정적 탄압도 있었다. 인간 박정희 전 대통령은 야당 지도자 김대중씨를 라이벌로서 두려워하였다. 어떻게 강력한 야당 지도자 김대중씨의 정치 생명을 앗아버릴까 궁리하다가 풍수지리를 활용했다는 설이 있다. 1970년대 초 당시 지관 지창룡은 다음과 같이 박대통령에게 조언했다.
[김대중씨의 생가가 있는 하의도는 용의 형상이며 그 앞에 작은 섬이 여의주에 해당됩니다. 그 여의주를 없애 버리면 김대중씨의 정치 생명은 끝장납니다.]
그 말을 듣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 섬을 깨뜨려 목포 선착장 공사에 썼다. 하의도는 목포에서 뱃길로 2시간 거리였는데 다른 섬들을 놔두고 하의도 앞 바위들을 가지고 선착장 공사에 쓴 것이다. 이는 정적 제거에 풍수가 부도덕하게 활용된 사례이다. 그래서였을까. 그 후 김대중씨의 은 정치 역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묘지 풍수의 폐단
이처럼 권력 쟁탈에 풍수가 활용됨으로써 풍수지리가 비난받게 된다. 조선조에 암장(暗葬), 투장(偸葬), 늑장(勒葬), 평장(平葬), 의분(擬墳) 등 다양한 불법 매장이 성행하였음은 이전 강의에서 밝힌 바 있다. 그밖에도 명당을 차지하고 있는 유골을 바꿔치기, 명당의 기존 유골과 섞어버리기 등 명당을 차지하기 위해 다양한 비도덕적, 비합법적 매장 방법이 동원된다. 조선조 때부터 이처럼 다양하고도 비도덕적 방법으로 문중과 집안과의 묘송(산송)이 발생했다. 이 묘송으로 인해 집안끼리 대대적으로 원수가 되기도 했다. 지금도 사회 지도층 인사의 묘지 풍수 선호 사상은 여러 폐단이 발생한다. 하지만 부정한 방법으로 명당을 잡아 권력에 오른다 해도 그 후손들의 결말은 좋지 않을 수 있다. 즉 응징이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