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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조루,금환낙지,오보교취

仁山 -세발낙지 2009. 11. 16. 09:57

남한의 3대명당과 "금환락지" "금귀몰니"
남한 3대 명당
 
지리산은 그 후덕한 기운 탓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살기 좋다는 3대 명당인 금환락지(金環落地)를 만들어 놓았다. 해발 1506m의 노고단이 형제봉을 타고 내려오다 섬진강 줄기와 만나면서 넓은 충적평야를 형성하였는데 그 천하대지가 구례 들판 어느 곳엔가 위치한다는 비기가 전해 왔다.
 
오늘날의 행정구역으로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가 그곳이다. 구례읍에서 경남 하동포구 쪽으로 가는 19번 도로를 타고 약 5km쯤 달려 가면 기름진 들판을 만나게 되는데 들판 아늑한 곳나다 옹기종기 마을들이 자리잡고 있다. 속칭 '구만들'이라 부르는 이곳의 마을들은 모두가 금환락지 명당터를 잡기 위해 외지인들이 몰려와 개척한 곳이라고 한다. 
 

 
특히 세상이 어지러울 때면 난세를 피해 찾아드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에 대한 좋은 기록이 남아 있다.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 토지면 가구수와 인구 변동의 연도별 통계를 살펴보면 1918년 70호에 350명이었던 인구가 1922년 148호에 744명에 이르고 있어 이곳을 찾았던 사람들의 대이동을 볼 수 있다. 나라는 망하고 일제의 수탈은 날로 가혹해지고 난데없이 몰려온 서양문물이 판을 치는 격동기의 급류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였던 사람들은 환란의 세월로부터 몸을 숨겨 안위를 구하고자 찾아들었던 것이다. 순천 부자 장씨 집안이 금내리로 이사해 올 때 그 행렬이 십 리까지 뻗쳤다는 구전도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옛 사람들이 믿었던 비기인 즉 봉성(구례의 옛 이름) 현 동쪽에 대지가 있는데 이곳에 터를 잡으면 무장이 천명 나오고 문장이 만명 나오며 백자천손으로 후손이 벌족하여 가히 만 호가 살 수 있는 땅이고, 모든 성받이가 함께 발복할 명당이라는 것이었다.
 
지리산 미녀와 금환락지라는 곳
 
옛 지사(地士)들은 한반도를 절세의 미인 형국으로 보았고 지리산이 자리잡은 구례땅은 그 미녀가 무릎을 꿇고 앉으려는 자세에서 옥음(玉陰)에 해당하는 곳이라 했다. 그리고 그 미녀가 성행위를 하기 직전 금가락지를 풀어 놓았는데 그곳이 명혈(名穴)이 되어 금환락지라는 것이다. 가락지는 여성들이 간직하고 있는 정표로서 성행위를 할 때나 출산할 때만 벗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에 가락지를 풀어 놓았다는 것은 곧바로 생산 행위를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금환락지라는 곳은 풍요와 부귀영화가 샘물처럼 마르지 않는 땅이라는 것이다. 현재 토지면(土旨面)의 지명도 본래는 금가락지를 토해 냈다는 토지면(吐指面)이었는 바 모두 이와 같은 풍수형국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또 어떤 이들은 금환락지는 지리산의 선녀가 노고단에서 섬진강에 엎드려 머리를 감으려다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곳이라고도 하고 그때 비녀도 함께 떨어뜨렸는데 그곳은 금잠락지(金簪落地)라 표현하기도 한다.
 
구례 금환락지의 풍수적 형국은 지리산의 주봉 노고단에서부터 그 신령스러움이 흘러오는데 월령봉을 타고 내려온 노고단의 용(龍)이 천황치에서 건너편 왕시루봉 줄기와 어우러져 섬진강을 끌어안은 모습이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터이고 안산(案山)으로는 강 건너 오봉산이 머리를 조아리며 춤을 추고 있다. 또 이곳은 우리나라 풍수지리가 태어난 탯자리이기도 하다. 구례에서 금환락지를 찾아가기 바로 전 마을이 장수촌으로 이름난 상사리(上沙里)와 하사리(下沙里)인데 도선국사가 이곳 모래밭에서 우리나라 산천 모습을 그려 놓고 공부하여 풍수지리의 오묘한 이치를 깨우쳤다는 곳이다. 그래서 도선국사가 모래밭에 그림을 그린 곳이라 하여 사도리(沙圖里)라 부르기도 한다.
 
금환락지는 또 다섯가지가 아름답다 하여 오미동(五美洞)이라 불렀다. 마을의 안산이 되는 오봉산이 기묘하고, 사방의 산들이 다섯 별자리가 되어 길하고, 물과 샘이 풍족하며, 풍토가 윤택하여 다섯가지 아름다움이 고루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좋은 터전인데다 관청과의 거리도 멀어 관리의 횡포로 부터도 안전하였고 난세에는 지리산 깊은 골짜기로 몸을 숨길 수도 있는 곳이었기에 혹자들은 이곳을 가리켜 두 마리의 학이 춤추고 있는 쌍학지지(雙鶴之地) 청학동으로 비정하기도 했다. 
 
아흔아홉칸 기와집 운조루
 
구례 금환락지에 자리잡은 대표적인 양택지는 운조루(雲鳥樓)이다. 이 들판의 영화로운 시절과 슬픈 이야기를 한 몸에 담고 있는데 호남지방에서는 대표적인 양반가옥이다.
 
운조루는 오미동 유씨 집안의 사랑채 누마루의 이름이지만 문화재 이름이 구례 운조루라 되어 있어 흔히 이 아흔아홉칸 기와집을 운조루라 불러온다. 이곳에 아흔아홉칸의 대저택을 세운 사람은 삼수공(三水公) 유이주(柳爾胄)였다.
 
유이주는 1726년 경북 해안면 입석동 출신으로 28세 되던 1753(영조29)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낙안군수와 삼수부사를 지낸 무관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기개와 힘이 뛰어났고 문경새재를 넘다 호랑이를 만났을 때 채찍으로 호랑이의 얼굴을 내리쳐 쫓아 버렸다는 일화가 전할 정도로 담대했다. 또 벼슬에 있을 때 남한산성을 보수하고 함흥성 축조작업 등 대규모 건축사업에 봉직하여 운조루 창건자로서 손색없는 경력을 보여준다. 창건 당시의 상황을 실감나게 말해주는 유이주의 행장에는 "세상 사람들이 이 오미동 집터를 길지라고 했으나 바위가 험하여 누구도 감히 집터로 할용하지 못한 것을 공(公)이 '하늘이 이 땅을 아껴두었던 것은 비밀스럽게 나를 기다리신 것'이라고 말하며 수백 명의 장정을 동원하여 터를 닦았다."라고 나와 있다.
 
유이주는 경북 대구 사람인데 그가 이곳으로 이주해 온 배경은 전라도 승주에서 낙안 군수로 재직하였던 시절 금환락지 명당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낙안 군수 시절, 관직에서 은퇴하면 이곳에 세거를 이룰 것을 작정하고 그때부터 운조루 건축사업을 시작하였다. 운조루의 대역사는 7년에 걸쳐 진행되는데 1776년에 유이주가 함흥성 오위장으로 발령이 났을 때는 축지법을 써서 하룻밤 사이에 천리길을 오가며 작업을 독려했다는 전설도 있다.
 
또 구례 오미동에는 금환락지와 더불어 3대 진혈(眞穴)인 금구몰니(金龜沒泥)와 오보교취(五寶交聚)가 있는데 유이주가 잡은 터는 금거북이가 진흙 속에 묻혀 있다는 금구몰니 명당이라고 한다. 집터를 잡으면서 땅을 파보니 금구몰니의 명당을 입증이라도 하듯 어린아이 머리크기만한 돌거북이가 출토되었다는 것. 그래서 집을 앉힐 때 부엌자리에 안방을 배치해야 할 구조였으나 거북자리를 안방으로 사용하면 아궁이에 불을 때기 때문에 거북이가 말라 죽는다고 거북이가 나온 곳을 습기 많은 부엌자리로 배치하기도 했다고 한다. 오보교취는 금, 은, 진주, 산호, 호박 등 다섯가지 보물이 쌓여 있기 때문에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 하늘의 도움으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명당으로 통한다. 이 세 명당은 오미동 구만리 들에서 상대 중대 하대를 이루고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서로 자기네 집터가 그 자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운조루 주인은 자기집 안채가 상대 금구몰니이고, 중대 그환락지는 행랑채 밖 연못자리이며 하대는 면 소재지에 있는 돌탑자리라고 한다.
 
한편 환동(環洞) 박 부자 집터 역시 그곳이 금환락지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원내리(垣內里) 사람들도 자기네 마을을 오보교취의 하대라고 생각하고 있다. 또 금내리(金內里) 사람들은 금환락지가 자기 동네 안에 있기 때문에 금내리라고 말한다. 이렇듯 오미리 일대 풍수촌들은 도선국사가 풍수지리를 깨우친 탯자리답게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무수히 간직되어 있어 가히 풍수지리가 춤추고 있는 땅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