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남고분군을 다녀와서....
반남고분군 - 주인 모를 이 커다란 고분은 누구의 무덤인가?
나주 영산포에서 남쪽으로 약 12km 떨어진 반남면 자미산 나지막한 구릉지.
대안리(사적 제76호), 신촌리(사적 제77호), 덕산리(사적 제78호) 일대에 30여기의 옹관고분이 있다.
신촌리 고분 군은 일제시대인 1917년 무렵에 발굴(도굴)된 것으로 보인다.
신촌리 9호분에서 금동관, 금동신발, 봉황문 환두대도 등 중요한 유물이 출토 되어,
서울대 최몽룡 교수는 이 곳이 '마한 목지국'의 마지막 거점지역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이곳 반남면 일대 고분군은 20여 기가 복원되어 있다.
▲ 전남 나주시 반남면 자미산 일대 구릉에 분포한 '반남 고분군' 모습 -
기록상으로 이곳은 백제 13대왕 근초고왕 때인 4세기 후반에 점령되어 백제 땅으로 완전 복속되었다.
그러나 고분에서 나온 커다란 옹관묘(독무덤)라는 묘제는 백제의 양식이 아닌 이 지방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양식이다.
이러한 무덤은 3~5세기에 집중적으로 형성된 걸로 보여 6세기 초까지 독자적인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더구나 금동관, 금동신발, 팔찌, 목걸이, 화살촉 등 수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고
금동으로 만들어진 장신구는 왕에 버금가는 세력이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백제와 신라보다 백여 년이 앞서 형성된 커다란 '분(墳)'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지금의 나는 과연 고구려의 북방민족의 후예인 백제의 후손인가
아니면 이곳에서 오래 전부터 터전을 잡고 삶을 유지하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이 고분의 후손인가?
손에 잡힌 듯 가까운곳에서 월출산은 묵묵히 앉아있다.
무덤의 이름에는 보통 '분(墳)'이나 '총(塚)'을 붙여 구별한다.
총은 그 무덤의 내적, 외적 특징이 뚜렷하여 고유명사를 따로 붙였을 때,
즉 날아다니는 말이 있으니까 '천마총' 무용하는 그림이 있으니까 '무용총'이 된다.
분은 누구의 무덤인지도 모르고, 별다른 특징이 없는 경우에 불러준다.
편의상 송산리 1호분, 2호분 처럼 숫자를 붙여 구분한다.
그리고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고, 왕세자, 왕세자비, 왕의 생모 등이 묻힌 곳을 '원(園)'이라 한다.
또한 대군, 공주, 옹주, 후궁, 귀인 등 일반 사람들의 무덤은 '묘(墓)'라 한다.
폐위되어 복권되지 못한 연산군, 광해군의 무덤 역시 묘라 한다.
건너편 보이는 산이
자미산(紫微山)이다
마한 시대 군사요충지였다고 한다
견휜이와 왕건이
전투를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2009.10.24.토
인산 쓰고 찍고...